132년 전 오늘…'갑신정변' 신호탄 피어오르다

머니투데이 이슈팀 조현준 기자 | 2016.12.04 05:55

[역사 속 오늘] 근대화 목표로 한 '위로부터의 혁명'…청군 개입에 '3일 천하'로 끝나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급진개화파 인물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사진=위키피디아 제공
132년 전 오늘(1884년 12월4일) 저녁 9시 우정국(우리나라 최초 우체국) 개국 연회장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근대화를 위해 쏘아올린 '갑신정변'의 신호탄이었다. 연회장에 있던 보수파 수령 민영익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은 당시 세계정세를 명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근대국가로 나아가려면 프랑스 혁명처럼 기존 기득권 세력과 구체제를 급진적으로 뒤엎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무렵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강제 체결로 근대 경제 체제, 즉 '자유무역'이라는 틀을 받아들이게 됐다. 문제는 '정치개혁'이었다. 신분제와 봉건적 토지 제도가 여전히 백성들의 삶을 누르고 있었다. 나라 밖으로는 서구뿐만 아니라 일본과 청이 조선을 압박했다.

이에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은 봉건적 신분사회를 무너뜨리고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돌파구로 정변계획을 구체화했다. 당시 일본 공사의 지원 약속이 있었기에 김옥균은 성공을 자신했다. 그는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을 이용해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 첫날 급진개화파 세력은 민영익을 시작으로 조영하·민태호 등 보수 기득권 세력으로 손꼽히는 이들을 처단했다. 이튿날에는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을 영의정으로 하고 나머지 요직을 급진개화파가 차지하는 내각을 발표했다.


3일째(12월6일)에는 국가 혁신을 위한 정강 14개조를 발표했다. 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한다는 내용과 평등권 제정,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조세 개혁 등의 내용이 담겼다. 개화파는 대외적으로는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 했고 대내적으로는 평등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이날 오후 청군이 들이닥치면서 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일본공사는 정변을 돕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인천으로 도망갔다. 고종은 정변 조치를 모두 무효라고 선언했다.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던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정권을 오래 유지할 힘이 부족했다. 일본 지원에만 의존해 정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갑신정변은 자주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최초의 정치운동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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