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세계

머니투데이 이영인 (필명)  | 2016.12.29 06:50

[1회 과학문학공모전 단편소설] 가작 '네번째 세계' <7> 호용



AT. 26

어제와 오늘 제시된 내용들이 너무 받아들이기 어렵다. 조금 더 알아보고 적자.


AT. 29

사흘 전 시아 이동의 벡터값을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 여행을 어디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알아냈다.

비상 보호 시스템의 경우 활성화된 것은 30일 전이다. 이것은 붕괴사고가 일어난 시점과 일치한다. 붕괴사고가 일어남과 동시에 시아가 주변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활성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으로 어떻게 감지했는지 따위의 일들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그래, 이건 어찌 보면 좋은 일이다. 나름 말이 되는 소리인데다 이것 덕택에 우리가 산 것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프로그램, 시간이동 프로그램이 문제다.

이 프로그램의 가동 시간은 일수로 따졌을때 34,675,042,248,655일이다.

34조 6천 7백 50억 4224만 8665일이다.

햇수로 따지면 95억 11만 5천 747년이다.

자그마치 100억년 가까이를 가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랬다. 생각해보면 숫자들은 문자보다 먼저 번역되었어야 한다. 문자는 순서를 바꾸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거나 의미가 아예 없어지지만, 숫자는 순서가 바뀌어도 그 정도로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번역하기는 숫자가 용이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토록 벡터값 번역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결과값이 받아들일 수 없는 단위였기 때문이다. 34조일.

스티브는 이 해석을 사건 초반에 확인했지만 당연히 오류라고 생각하고 재해석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검토를 하고 입력값을 바꿔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사흘동안 시아 안에 들어있는 숫자란 숫자는 깡그리 뒤져서 뭔가 적절한 해답이 없는지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그리고 오늘 녀석이 충혈된 눈으로 내게 말했다.

“오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가동시간이 95억년이라면 모든 값이 맞아떨어집니다.”

이제는 어떻게 뭐라고 할 기운도 없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95억년동안 작동하고 있는 이 물건이다. 대체 뭘 어떻게 만들어놨길래 95억년 이상을 가동하고 있는 것인가. 프로그램 연속 실행만 95억년인 것이니 시아 자체의 가동시간은 당연히 그 이상을 작동하고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지금은 오작동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95억년 이상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공학자들이 봤으면 목숨을 내놓고 뜯어볼 것 같다. 라다도 뭘 어떻게 해서라든 뜯어봤겠지. 그놈 성격이라면 뜯으면 죽는 물건이라도 뜯어보고 죽었을거야.


스타니슬라프는 기계가 고장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품에 마모나 균열 등의 결함이 발생해서 오작동하지만, 이 시아는 시공간을 다루는 기기이니만큼 시간과 관련된 어떤 능력으로 결함을 스스로 복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게 옳다면 이 기계는 한마디로 불사란 얘기가 된다. 시간을 달리고, 블랙홀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불사의 기계라니, 끝내주는군. 이걸 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계를 정복할 수도 있겠어.

그런데 분석을 계속하다보니 이걸 만든 놈들이(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로 경이로운 놈들이다)실제로 95억년 전에 살았던 것 같지는 않았다. 시아는 과거에도 시간이동을 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벡터값으로 추측해본 시아의 움직임은 이렇다. 이 기계는 우리가 원래 살던 시점보다 약간 더 미래에 만들어졌다. ‘미래에 만들어졌다’라니, 흥미로운 문구로군. 여하튼 구체적인 시기까지는 특정할 수 없으나 대략 400~700년 후에 만들어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기에서 약 18억년을 과거로 돌아갔다. 뒤의 숫자도 들었는데 생략한다. 앞자리가 억대라니, 감당이 되지 않는다.

벡터값만 분석한 것이기 때문에 왜 과거로 돌아간 것인지, 가서 무엇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과거로 가서는 20억년을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지냈다. 20억년 동안 본래 시간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분명히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시점에서 또다시 20억을 과거로 돌아갔겠지.

그렇다, 이놈은 20억 년짜리 시간여행을 이미 두 번이나 해온 것이다. 그 후로 다시 정상적인 세월을 거쳐서 18억년 후에, 이 머나먼 태양계 끝자락에서 우리와 조우한 것이다.

정리해보자. 18억년동안 과거로 시간여행을 했다가, 20억년동안 그냥 우주를 지켜본 다음, 갑자기 또 20억년동안 과거로 시간여행을 했다. 그 후로 18억년동안 또다시 정상 시공간에서 그대로 있었다. 그러니까 이놈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시간여행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그 후 지금은?

쓰면서 현실감도 생기지 않는다. 19억년 전으로 돌아와 있다.

돌아가는 중도 아니고 이미 19억년 전으로 와 있다. 이놈이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또 한 것이다! 이번엔 우리까지 덩달아서. 젠장, 이 벡터값이 진심으로 문제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한다.

19억년이다, 19억년. 자료를 뒤져보니 그렇게 고대의 생물로 생각되는 공룡이 대충 2억년전에 나왔었다. 19억년? 지구로 돌아간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 지구는 풀도 나무도 없다. 아주 원시적인 진핵생물 따위가 있을 뿐이다.

이 기계는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가 미래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아직까지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게 문제다.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하튼 밖에 있는 블랙홀 비스무리한 것도 받아들였고, 시공간이동이라는 것도 납득했다. 미래로 이동한 경우에는 영영 우리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영영 가족을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거기까지도 각오를 했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 벡터값을 보자면 이놈은 광속으로 미래를 가는것도 아니고,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이용해 과거로 가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과거로 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미 우리끼리 수차례 정리하고 검토했던 사항이다. 그런데 이 데이터에 의하면, 시공간의 비틀림을 이용해서 워프를 한 것이 아니라 20억년씩을 온전히, 일 초 일 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시간을 그렇게 거슬러 이동할 수는 없다. 현대물리학에서 불가능하다고 규정하던 방식이다.

정말 끝내준다. 그나마 가능한 경우의 수를 애써 따져서, 최악의 상황까지 마음의 준비를 해 놓고 있었는데, 그것을 여지없이 뒤엎어 버렸다. 저 놈 안에는 신이라도 살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이제 뭘 어찌 해야 하지?

원인을 분석하자며 의지를 불태우고 불과 며칠만에, 이 정신나간 숫자들 덕택에 머리가 몽롱하다.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해석이 잘못된 것이어야 한다. 무언가 놓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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