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잃은 노인이 기자의 수첩에 적었다. 뇌졸중 후유증을 앓는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에 찾아온 참이었다. 그는 작은 방 앞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구둣주걱을 발뒤꿈치로 밀어 넣고 검정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동작은 느렸고, 일어설 때 몸은 휘청거렸다. ‘무진 나그네’(김지하)의 실제 주인공 김승옥(75). 순천은 그의 고향이자 소설 ‘무진기행’의 가상 도시 ‘무진’의 모델이다.
지난 18일 순천문학관 김승옥관 별실 앞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통상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를 보필해온 순천문학관 직원 조성혜씨가 필담 소통을 도왔다. 김승옥은 기자의 수첩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한쪽 뇌는 ‘50%(뇌졸중)’= 뇌졸중 치유가 진전됐느냐는 물음에 그는 사람의 머리 옆모습을 그려 답했다. 사람의 머리인 듯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그 뇌를 절반으로 나누고 나서 앞부분은 100%라고 표기하고, 뒷부분에 50%라고 적었다. 50%라고 적은 부분에 괄호를 치고 ‘뇌졸중’이라 적는다. 작가는 지난 2003년 뇌졸중을 앓고 나서 언어 능력을 크게 잃었다. 세종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2003년, 동료 문인 이문구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에 쓰러졌다.
무궁화(1270…)= 김승옥관까지 어떻게 찾아왔는지 묻자 “기차(무궁화. 12,70…)”라고 적었다. 괄호 안에 기차 요금을 적어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였지만 이따금, 펜을 처음 잡아본 사람처럼 필기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는 ‘집 x’라고도 적었다. 자기 집이 없다는 얘기다. 그는 서울 강북구 번동 장모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3년쯤 전부터 순천을 찾는다. 한 달에 보름은 서울, 나머지 기간은 순천에서 지내고 있다.
조씨는 "선생님께서 치료를 위해 아파트도 처분하신 것으로 안다"며 “선생님께서 뇌졸중 치료비를 대느라 아파트도 팔았다”며 “KTX를 탈 돈이 아까워 장애 할인 혜택 등을 받아 무궁화호로 오고 계신다”고 안타까워했다.
“최순실 사건-> X”= 병으로 말을 잃었지만, 그 역시 시국을 염려한다. 기자가 ‘최순실 사건’이라고 적자 그는 ‘최순실 사’까지 밑줄을 긋고->‘X’라고 적었다. ‘아니다’ 라는 뜻이냐고 되묻자 “그...그...그...그럼, 그럼”이라고 답했다.
조씨는 "자기(김승옥)도 방 안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접하고, 시국에 대해 듣지만, 자기 마음을 표현할 만한 방법이 없으니 간단하게 얘기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소설가 →(뇌졸중) 미래" "그림 → 돈!”=‘또 쓰고 싶은 소설’을 묻자 그는 “소설가 ->(뇌졸중) 미래”라고 적었다.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의미일까. 그는 “그림->돈!” 이라고도 적었다. 그리고 웃음을 건넨다. 그림을 그려 돈을 벌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지난 7월, 김승옥은 서울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김승옥 무진기행 그림전’이란 전시를 열며 화제를 모았다.
김지하는 김승옥을 소개한 글인 '무진 나그네'에서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고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는 한없이 겸손하매 나에게 그는 하나의 기적처럼 보였다.”고 썼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을 비롯해 ‘서울·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장’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어둠 속에 떠 있는 신의 ‘흰 손’을 본 그는 신앙생활과 신학 공부에 힘을 쏟으며 살아오던 중 뇌졸중으로 침묵의 세계와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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