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간 개헌 공백기…10차 개헌 시대 열릴까

머니투데이 구경민 기자 | 2016.10.25 05:31

[the300][30년만의 개헌]개헌 추진의 역사, 9번 중 6번 권력자들에 유린…87년 개헌 이후 논의 지속



대한민국 헌법이 10번째 개정헌법으로 고쳐질 수 있을까. 집권여당 내에서 금시기 돼왔던 '개헌'을 박근혜 대통령이직접 거론하면서 10번째 개헌시대가 열릴지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현행 헌법은 1948년 제정헌법이 공포된 뒤 총 9차례의 개정을 거쳤다. 가장 최근에 이뤄진 개헌이 1987년임을 감안하면 그 이전 40여년 동안 평균 4년6개월마다 한 차례씩 개정한 셈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1948년 7월17일 제정됐다. 이때 건국헌법이 제정되며 한국의 헌정사(憲政史)가 시작됐다. 이후 총 9차례의 개헌을 겪은 헌법은 단 3차례를 제외하고는 권력자들의 필요에 의해 고쳐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개헌이 독재정권하에서 빠르고 기습적으로 행해졌고 권력구조를 바꿔 정권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헌법을 고치는 권한을 가진 국회는 견제 세력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입법부의 권한을 권력자의 구미에 맞추기 위한 '시녀'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첫 개헌은 1952년 7월4일에 이뤄졌다. 일명 '발췌개헌'이라고도 불리는 제1차 개헌은 '대통령 직선제'가 골자다. 1950년 5월3일 총선이 야당의 승리로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 본인의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해 계엄령을 선포, 정부안과 국회안에서 일부 발췌한 안으로 개헌을 단행했다.

두번째 개헌은 2년 뒤인 1954년 9월 이승만이 3선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조항을 폐지하는 '3선 개헌'을 단행했다. 국회 투표 결과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개헌 정족수인 재적 의원의 3분의 2에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됐다. 하지만 이승만은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논리를 펼치며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이는 결국 4·19 혁명을 불러왔다. 2차 개헌의 핵심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특정인 예외조항'을 둬 종신집권으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차 개헌은 이승만이 3월 15일 대선에서 3선에 실패하고 4·19혁명으로 대통령을 사임한 1960년 6월 15일에 있었다. 이때 내각책임제라는 한국 초유의 권력구조를 채택하게 된다. 합법절차를 거친 모범적인 개정이었다. 4차 개헌은 그 해 3월 15일 부정선거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며 여론이 들끓어 단행됐다. 혁명 완수를 위한 특별법(소급처벌입법) 제정의 헌법적 근거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5차 개헌은 대통령제 개헌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다음해인 1962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장교들이 모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대통령제 개헌안을 의결하고 같은 해 12월 국민투표로 가결시켰다. 6차 개헌은 5차개헌 이후 7년만인 1969년에 이뤄졌다. 임기를 2년여 남겨뒀던 박 전 대통령은 3선을 노리고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라는 개헌안을 내놨고 이를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여야가 극한 대립을 하던 중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6차 개헌을 통해 3선에 성공한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17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을 통해 국회를 해산한 박 전 대통령은 입법권을 대행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세우고 여기서 그 유명한 '유신헌법'을 의결했다. 대한민국 헌법의 일곱 번째 개헌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1962년 다섯 번째 개헌을 단행했던 박 전 대통령이 불과 10년 만에 영구적인 대통령직 유지를 위해 대통령을 국민 직선제로 뽑던 것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간선제로 하고 중임제한도 없이 영구 집권을 허용하는 개헌을 했다. 종신 대통령이 된 것이다. 7차 개헌 헌법이 바로 군부독재의 상징과도 같은 '유신헌법'의 선포였다.

다음 개정은 전두환 정권서 이뤄진다. '유신헌법'을 개헌한뒤 7년째 대통령직을 이어오던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10·26사태로 서거했다. 하지만 곧이어 1980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과 5·17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일으키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이 기구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여덟 번째 개헌이 단행됐다. 여덟 번째 개헌안의 골자는 대통령 간접선거로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연장했다. 전 전 대통령은 1981년 2월 개헌안에 따라 5278명의 대통령선거인단을 선출했고 이들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후 연세대학생 이한열의 죽음으로 촉발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거센 바람속에 최초로 여야 합의 하에 9차 개정이 이뤄졌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6월 항쟁의 성과로 발표한 6·29 선언의 골자는 대통령제 직선제와 민주화조치, 김대중 복권 등이었다. 이에 국회는 대통령직선제를 통한 5년단임제를 헌법에 넣은 개정안을 가결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야 합의에 의한 평화적 개헌으로 평가받는다.

이 9차 개헌이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지속돼왔다. 이후에도 개헌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개헌 논쟁에 불씨를 지핀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해 선거구제 개편을 받아들인다면 내각제 수준으로 대통령 권한을 이양할 용의가 있다'며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개헌 논쟁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당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격론으로 실패했다. 2년 뒤 노 전 대통령은 임기를 1년 앞두고 특별담화문을 통해 '4년 중임제 전환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을 다시 한번 제안한다. 이때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참 나쁜 대통령이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국민이 불행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2010년 8·15 경축사를 통해 '국회 중심의 개헌 논의'를 주문했다. 18대 국회 김형오 국회의장, 박근혜 정부의 19대 국회 강창희 의장은 각각 의장직속기구를 통해 개헌안을 연구했다. '강창희안'은 직선 대통령이 외교국방을, 국회가 뽑는 국무총리가 내무를 맡는 직선제 분권형 대통령제를 제안해 정치구조에 집중했다.


20대 국회가 시작되면서 개헌은 화두로 떠올랐다.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정세균 국회의장은 6월 20대 국회 개원사를 통해 "특위를 통해 빠르게 개헌을 논의하면 좋겠지만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의장직속 자문기구를 만들겠다"며 개헌론에 불을 지폈다. 이후 여야 의원 가릴 것 없이 정치권 내에서 다양한 개헌 의견이 재분출됐고 지난달에는 여야 의원 185명이 개헌 추진 국민모임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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