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우뭇개 해안에서 만난 해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6.10.22 07:11

<40> 나는 여전히 길 위에서 배우고 있다

편집자주 |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제주도 성산 우뭇개 해안에서 만난 오순덕(71세·가명) 할머니는 반(半)쯤 은퇴한 해녀다. ‘반’이라는 애매한 단어를 쓴 까닭은, 물에 들어가긴 하지만 본격적인 물질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할머니는 여전히 자신을 해녀라고 믿고 있었다.

“나? 하군(下軍)은 무슨 하군. 똥군이요. 하하”

해녀의 등급을 가리는 상‧중‧하군 중에 어느 군에 속하느냐는 질문에, 오 할머니는 자신을 똥군이라 이르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음 속 빈자리에서 ‘화려했던’ 날들에 대한 향수를 읽고 말았다.

몸 아파 더 이상 깊은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할머니는 ‘해녀의 집’ 소속으로 관광객을 위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얕은 바다에 들어가 하루 두 번 씩 물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해산물을 관광객에게 파는 게 일이다. 할머니가 더 이상 먼 바다에서 물질을 못하는 건 나이 탓만은 아니다. 제주도에서, 그깟(?) 일흔 한 살 정도는 한창 나이기 때문이다. 제주 여자들은 물속에서 숨만 쉴 수 있다면 일흔이든 여든이든 고무옷을 입고 바다에 들어간다.

오순덕 할머니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기침을 주체하지 못했다. 금방 물에서 나온 터라 숨이 가쁜 탓도 있지만, 평생 물질로 얻은 병이 깊은 까닭이다. 안타까운 눈빛을 읽었는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오늘은 약을 안 가져와서 그래. 심장이 안 좋아서 깊은 델 못 들어가. 당뇨도 있고…. 진통제를 하루 두 번은 먹어야….”

노인의 기침은 각혈 같은 한숨을 동반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전복이니 소라니 따 올리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노인의 눈동자를 달음질쳤다.

“열여덟 살에 시작했어. 혼인하기 전이었지. 처녀 때 시작해야지, 시집가서는 못해. 그땐 당연한 줄 알았어. 배운 것도 없고 먹고살려니까….”

열여덟 살에 시작해서 일흔 하나면 53년을 물속에서 살았다.

“이제 하려는 사람이 없어. 누가 이 힘든 일을 하나. 옛날에는 물질 안 하면 구박을 받고, 또 그거 아니면 살 길이 없었지만 지금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젊은 사람들은 물질 같은 거 쳐다도 안 봐.”


새로 물질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물음에 고개부터 내저었다. 하긴 누가 그 힘든 일을 배우려고 할 것인가. 물론 아직도 해녀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제주도의 해안을 따라 돌다보면 곳곳에서 ‘어촌계’나 ‘해녀의 집’을 볼 수 있다. 심각한 건 숫자가 아니라 고령화다.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바다에서 나오고 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해녀들은 바다가 있고, 그 바다가 키워내는 소라‧전복‧성게가 있기에 숙명처럼 물에 들어간다. 하지만 물질은 매번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데도 삶을 마치는 날까지 그곳을 잊지 못한다. 고통도 몸 안에서 화석처럼 굳어지면 그리움이 되는 걸까. 해녀들이 바다에 한번 나가면 적어도 4시간 이상 물질을 한다. 자맥질 숫자로 보면 300번 정도라고 한다. 한번 잠수하면 물속에서 2분 정도를 견디는데, 보통 소라 5~6개를 건져 나올 시간이다.

제주 해녀들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여자’라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온몸의 진을 내어준 대가를 자식들을 가르치는데 아낌없이 쓰는 여인들. 자식들이 자란 뒤에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거나 부담 되지 않으려고 물질을 멈추지 못하는 어머니들. 그녀들이 습관처럼 털어 넣는 진통제는 약이 아니라 슬픔 덩어리일 것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급하게 불려 들어간 오순덕 할머니는 고무옷을 벗지도 못 한 채 손님들이 주문한 전복죽을 끓이고 있었다. 인사 대신 덥석 잡은 손에는 등걸처럼 마디진 세월과 거친 파도가 뒤채고 있었다.

“할머니, 건강 잘 챙기세요. 이제 그만 쉬셔야지요. 이렇게 편찮으시면서 어떻게….”

“이놈의 약값 땜에 쉴 수가 있나. 한 푼이라도 벌어야….”

소금기 묻은 미소로 버무려 감춘 서러움이, 달궈진 인두처럼 가슴을 지져대는 바람에 서둘러 등을 보이고 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원망이나 하고 투덜거리던 내 삶이 얼마나 안온한 것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길 위에서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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