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김영란법과 '천지비'(天地否)

머니투데이 박종면 본지 대표 | 2016.10.17 04:03
일반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은 1993년의 금융실명제법보다 파괴력이 더 크다.

금융실명제는 자산이나 금융소득이 별로 없는 보통사람들과는 무관한 제도다. 이에 비해 김영란법은 대상자인 공직자 교직원 언론인 등 400만명은 물론이고 이들과 만나고 접촉하는 사람들도 법 적용을 받기 때문에 사실상 전 국민이 대상이다. 게다가 김영란법은 밥 먹고 술 마시고 경조사에 오가는 등 보통사람들의 실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럼에도 김영란법은 준비가 미흡했고 근원적으로는 법을 제안하고 만든 사람들조차 이해를 제대로 못했다. ‘벤츠검사’ 사건이나 세월호 사태 등을 계기로 막연히 청렴한 사회를 만들겠다거나 공공부문 종사자들을 향한 따가운 눈총만을 의식해 포퓰리즘적으로 대응했다.

더욱이 주무부처인 국가권익위는 법 해석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함으로써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제 김영란법은 시행 초기 전 국민을 꽁꽁 묶어버리고 말았다.

김영란법의 최초 제안자인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은 예의 그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더치페이 좋지 않나요?”라며 법을 옹호했고 많은 사람이 김영란법을 ‘더치페이법’쯤으로 이해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사람들은 자기돈을 내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게 아니라 만남 자체를 기피한다. 오해를 사는 게 싫고 각자 계산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영란법은 교사와 공무원과 언론인의 배우자가 낀 동네 소모임조차 해산시킬 정도다.

그 결과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실직 위기에 내몰리고 대리운전기사는 일거리가 반토막났으며 화훼·한우농가들은 몰락의 위기를 맞았다. 김영란 전 위원장께 “어쩌면 세상물정을 그렇게도 모르실까” 묻고 싶다.


김영란법을 탄생시킨 또 다른 주역은 19대 국회 정무위원회 간사로 일한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과 김기식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김용태 의원은 학생이 스승에게 캔커피나 카네이션 꽃을 주는 것도 법 위반이라고 해석하는 권익위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과연 정당한 비판인가. 김영란법은 다른 법들과 마찬가지로 주무부처인 권익위와 국회가 협의해 만들었다. 그래놓고는 이제와서 모든 것을 권익위 탓으로 돌리는 건 말도 안 된다.

김영란법을 ‘더치페이법’이나 ‘저녁이 있는 삶’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반대로 김영란법을 서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실생활에서 불편을 초래하는 법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건 너무 단편적이다.

김영란법의 근원적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하고 만남을 끊어버리고 고립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 사회관계망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언론인과 교직원을 포함한 것은 치명적 잘못이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끊어지고 만남의 고리 역할을 하는 매개체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다. 그런 곳에서는 어떤 역동성도, 어떤 창의성도 기대할 수 없다.

주역의 64괘 중 가장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천지비’(天地否)다. 소통되지 않고 막힌 상태를 말한다. 공자 등 성현들은 천지비의 괘를 이렇게 해석한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만물이 서로 통하지 못한다. 상하의 마음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소인의 도는 장성하고 군자의 도는 소멸한다.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

김영란법을 제안하고 만든 사람들의 순진함과 단순함, 포퓰리즘, 나아가 철학의 빈곤이 안타깝다. 이제 우리에겐 대가를 치르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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