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년 전 오늘… 일제 침탈자들에 의해 국모를 잃다

머니투데이 진경진 기자 | 2016.10.08 05:45

[역사 속 오늘]시해 주범들, 본국으로 소환 후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석방

명성황후 초상화./자료=위키피디아

'황후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러시아 공사 위베르의 보고서)

일본정부에게 명성황후는 눈엣가시였다. 명성황후는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데 가장 의지한 상대였고 외국에선 왕인 고종보다 더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본 인물이었다.

명성황후는 하루라도 빨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중 하나가 러시아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추진되는 동안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랴오둥 반도를 얻어냈다.

하지만 청은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다시 라오둥 반도를 돌려받았다. 조선 역시 일본을 견제하고 있는 러시아의 힘을 빌리면 일본 세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명성황후는 일본이 강제적으로 제정한 신제도도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군대도 해산하고자 했다.

조선에서 반일 감정이 커지는 것을 느낀 일본은 이 모든 게 명성황후 때문이란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왕비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암호명은 '여우 사냥'이었다. 이를 지휘한 것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을미년(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미우라의 사주를 받은 사무라이 낭인 40여명은 서대문과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궁궐 뒷편 왕비침실인 옥호루를 습격했다.

궁궐에 침입한 사무라이들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알지 못해 함께 있던 궁녀들까지 모두 살해했다. 결국 왕비를 찾아낸 이들은 집단으로 폭행하고 무참히 살해했으며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 불태웠다.


전쟁도 아닌 시기,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나라의 국모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세계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내국인은 물론 미국인과 러시아인 등이 자리해 그 진상을 목격했다. 이로 인해 사건의 전말이 외국에도 알려지면서 국제적으로도 거센 비난이 일었다. 이를 의식한 일본은 범인들을 본국으로 소환해 재판을 진행했다.

당연히 우리의 법으로 능지처참해야 할 일이었지만 불가능했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때문이었다. 강화도 조약 안에는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 사이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해 자국의 법에 의해 처리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으면 우리법대로 심판받는 게 아니라 일본 법대로 심판받는다는 것이다. 일명 치외법권이다.

결국 자국에서 재판을 받은 범인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훗날 이들 중에선 일본의 국회의원이나 재벌도 나왔다.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고 조선은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게 됐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지 2년이 지난 1897년에서야 국장이 치러졌다. 시신도 없는 슬픈 장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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