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천만볼트에 육박하는 고통

머니투데이 공광규 시인 | 2016.09.10 03:10

<65> 조용미 시인 ‘나의 다른 이름들’



나의 마음속에는 내가 알지 못할 고통이 있다 잘 만져지지 않는 딱딱하고 커다란 고통이 있다
천만볼트에 육박하는 고통이 있다 전류가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고통도 함께 있다
나의 마음속에는 늙은 슬픔이 살고 있다 알지 못하는 어떤 한 사람이 살고 있다
분명하다 나의 마음속에는 알지 못할 인격의 고통이 함께 숨 쉬고 있다
나의 숨을 야금야금 빼앗으며 그는 평생 나는 괴롭혀 왔다 알지 못할 고통이 웃고 있다 나의 몸속에는 - '나의 몸속에는' 전문


거의 일관되게 만연체의 시 문장을 구사하는 조용미 시인의 시집을 읽는 내내 내면의 응시와 침잠, 고통, 차분한 사색, 환상이라는 몇 개의 어휘를 떠올렸다. 이것이 어쩌면 조용미의 개성적 문체로 굳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화자의 마음속에 화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 이 무형의 고통은 구체적으로 감각되는 것이 아니어서 측정불가다. 고통의 크기는 천만볼트라는 전력의 단위로 계산된다. 그 안에는 전류가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또 화자의 마음속에는 늙은 슬픔이 살고 있으며, 화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이러한 고통이 생명을 괴롭히며 하루하루 생명을 갉아먹는다고 한다. 더구나 고통이 웃고 있다니, 고통과의 즐거운 화해다. 아마 고통은 인간의 존재요건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고통 없는 인생은 없다.

조용미는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하여 첫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냈다. 이번 시집은 6권 째다. 시인은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여행하면서 만난 오동나무에서 자신의 늙어가는 신체를 비유한다.

이를테면 “능금마을 오동나무는 죽은 몸에서/ 새 가지가 길게 나왔다// 죽은 가지는 꺼멓고 새 줄기는 은빛이다// 죽은 가지는 옆으로 비스듬하고/ 새 가지는 위로 반듯하다// 죽은 오동은 누웠고 산 오동은 섰다// (중략) 내가 없는 이상한 문장을 새기고 있다/ 내 몸을 뚫고 자라난다/ 나는 옆으로, 누웠나보다”(‘오동’ 부문)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의 시 가운데 ‘봄, 양화소록’이 빛난다는 생각이다. 연애시라고 봐도 된다.

봄날 하릴없어 옥매 두 그루 심었습니다

꽃필 때 보자는 헛된 약속 같은 것이 없는 봄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군요

내 사는 곳 근처 개울가의 복사꽃 활짝 피어 봄빛 어지러운데 당신은 잘 지내나요

나를 내내 붙들고 있는 꽃 핀 복숭아나무는 흰 나비까지 불러들입니다

당신은 잘 지냅니다.

복사꽃 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봄날이 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아슬아슬 잘 지냅니다

가는 봄 휘영하여 홍매 두 그루 또 심어 봅니다 나의 뜰에 매화 가득하겠습니다
- ‘봄, 양화소록’ 전문

화자가 봄에 옥매 두 그루를 심으며 꽃필 때 보자는 약속을 한 모양이다. 옥매를 선물하거나 분양한 사람일 수도, 마음에 두고 있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약속들은 대개 헛되다. 고맙다는 답례로 보내는 의례적인 말이거나 그냥 헛말이기 때문이다.

이미 화자가 사는 곳은 복사꽃이 피어서 흰 나비까지 불러들이는 봄이다. 중반부터 화자는 당신은 잘 지낸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화자는 홍매 두 그루를 또 심는다. 내년을 기약하는 것이다.

조용미 시인은 시에 고전이나 사찰, 불교 등 의고적 재제를 적지 않게 수용한다. 다른 시 ‘습득자’에서 화자는 수령 640년을 살다가 고사한 매화나무가 있는 별서터에 있다. 주춧돌을 따라 탑돌이를 하다가 파도문 와편을 만져보며 칠성각 물고기 벽화를 상상해내기도 한다. 벽화의 물고기는 큰 나무를 등에 심고 다닌다. 고통의 상징이다.

시 ‘겨울 하루, 매화를 생각함’에서는 “매화가 피는 한 생이란/ 매화를 보지 못하고 기다리는 한 생”이라고 한다. 시인의 매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시를 통해 빛난다.

◇ 나이 다른 이름들=조용미 지음. 민음사. 161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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