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원리'와 '공식' 설명보다는 풀어내는 글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니체, 고흐, 보르헤스 등 시인, 소설가, 철학자, 화가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갈릴레오의 빛에 대한 연구 이야기를 하면서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가 등장하고 연금술 논의를 하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나오는 식이다.
'과학한다는 것'은 '과학책'이라고 규정하기엔 아까운 거대한 교양서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인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대중과 유리된 과학이 더 이상 '교양'의 범위에 들지 않게 됐다는 점을 꼬집는다.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과학자들만의 세계에 갇혀있고 사회와 점차 동떨어지면서 '그들만의 세계'에 안주하게 됐다는 것.
저자는 과학과 사회를 연결하기 위해 '예술'을 꺼내든다.
"우리가 과학에서 어떤 전체적인 양식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먼저 과학을 반드시 예술로 생각해야 한다." (괴테)
200여년 전 독일의 시인 괴테가 그랬듯 피셔 교수는 과학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예술과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예술적 감성이 없는 과학은 인간을 소외시키며 우리는 그런 과학을 신뢰할 수 없다"며 "우리가 과학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과학도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감성을 가진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나치 독일에 대항한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예를 든다. 원자폭탄 개발의 일등공신인 그는 원자폭탄을 실제로 사용할 때 근대과학이 얼마나 위험하게 작용할수 있는지 목격한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T.S.엘리엇과 같은 문학가들과 대화하며 유럽의 문명에서 과학이 차지한 위치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또 예술가와 과학 연구자들의 협력과 화합에 노력한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오펜하이머야 말로 '사회 속 과학'을 연구한 과학자다.
그래서 그의 책 '과학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과학 현상이나 세부적인 설명에 천착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근대 과학이 탄생하는 과정, 연금술과 점성술의 끈질긴 생명력, 우주와 기하학, 원자물리학, 생물학적 진화론, 카오스 이론 등을 훑어나가면서 끊임없이 세상과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우주를 파악하기 위해서 뉴턴부터 칸트,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흥미진진한 논의를 둘러본다. 과학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인간이 어떤 문화를 이룩해냈는지도 함께 살펴본다. 또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연구와 비교해보기도 한다.
저자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을 인용해 과학이 "거울이 아닌 창문"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삶과 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도구라는 것. 때론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역으로 가져다 놓는 창문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교양인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와 같이, 책은 과학과 예술의 연결을 통해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습득하게 해준다. 문과생이든 이과생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단, 500여쪽에 이르는 거대한 양장본을 진득하게 읽는 일은 조금의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 과학한다는 것=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김재영·신동신·나정민·정계화 옮김. 반니 펴냄. 510쪽/2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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