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가는 여행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6.07.30 07:42

<28> 강원도 정선 백전리의 물레방아에서

편집자주 |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강원도 정선의 백전리 물레방아. 왼쪽이 물레고 오른쪽이 방앗간이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내가 여행작가가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어쩌다 산 작은 카메라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동네 풍경을 찍다가 조금씩 멀리 나가게 되면서 여행의 맛에 빠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찍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뭔가 테마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작업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라져가는 사물과 풍경을 찍고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 그 글들이 출판사의 눈에 띄어 책을 내게 되면서 여행작가라는 이름도 얻었다.

참 많은 것들을 찍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뒤로 10년도 훨씬 더 지나다 보니 기록을 한 뒤 영원히 사라진 것들도 많다. 그중 하나가 지금은 빌딩 숲으로 바뀐 종로 1가 인근의 피맛골. 다행스럽게도 하나하나 사진으로 찍어둘 수 있었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를 했던 장인(匠人) 중 몇몇 분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시절, 가장 인상에 남은 곳이 백전리 물레방아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백전리 96번지. 그곳까지 찾아가 물레방아를 만났을 때,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직도 이렇게 완벽한 형태의 물레방아가 남아있다니…. 물레방아는 떨어지는 물의 힘으로 물레를 돌려 곡식을 찧거나 빻는 기구를 말한다. 큰 나무물레와 굴대에 공이를 연결해서 물레가 돌 때마다 공이가 오르내리며 곡식을 찧는다. 마을마다 기계식 방아가 들어오면서 물레방아는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대형 음식점이나 관광지에서 흔히 보는 물레방아는 장식용일 뿐이다. 전기로 돌리거나 그나마 돌아가지 않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백전리 물레방아는, 처음 찾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가끔 방아를 찧을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물레에 이끼가 잔뜩 돋았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백전리는 옛날에 화전민들이 주로 거주하던 산골마을이다. 물레방아에 물을 공급하는 하천을 사이에 두고 삼척군 하장면 한소리와 마주보고 있다. 언제쯤 이곳에 물레방아가 들어섰는지 문헌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약 1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물레방아 앞의 안내판에는 1900년경에 설치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물레방아라고 쓰여 있다. 전통식 물레방아의 원형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물레방아의 시설은 크게 물레 부분과 방아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백전리 물레방아는 물레 좌우에 십자목(十字木)을 설치한 양방아로, 방아공이는 방앗간 안에 설치돼 있다. 지금의 방앗간은 1992년에 전면 보수한 것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전형적인 산간 마을 가옥 형태를 보여준다. 지붕은 대마(大麻)의 속 대궁으로 덮은 저릅집이며, 벽에는 나무판자를 댔다.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면 돌로 만든 2개의 방아확을 볼 수 있다.

물레방앗간은 예로부터 숱한 이야기를 품어왔다. 방앗간 내부는 꽤 넓어서 머물 곳 없는 길손이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걸인들이 유숙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소설 등 문학작품의 배경으로도 많이 등장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인연을 맺은 곳이 물레방앗간이었다. 나도향의 단편 '물레방아'도 신치규와 이방원의 아내가 물레방앗간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며칠 전에 오랜만에 백전리 물레방아를 찾아갔다. 몇 년 가보지 않은 사이에 쇠락해가는 모습이 역력해서 가슴이 아팠다. 물레 쪽으로 콸콸 물을 보내던 나무 수로도 거의 말라 있었다. 물레에 무성하게 돋은 이끼만 오랜 시간을 말해줬다. 마침 할머니 한분이 지나가길래 인사를 하고 물었다.

“요즘은 여기서 방아 안 찧나요?”

“안 찧은 지 오래 됐쥬. 서울에서 왔으면 더덕이나 좀 사 갖고 가슈”

하긴 지금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누가 물레방아로 곡식을 찧을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을 내려놓기 쉽지 않았다. 대대로 잘 보존돼서 조상들의 삶을 전해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한참동안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사라져가는 것들은 여전히 많다. 그 뒷모습을 제 때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테마 여행을 계속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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