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간만에 만져보는구나’가 아닌 ‘참 오래간만에 만져보자꾸나’. 이 얼마나 설레고 정겨운 말인가. ‘오래간만에’ 손주를 만난 할머니의 맘 같은 말, 대처로 떠돌다 고향에 이르러 들이쉬는 들숨날숨 큰 숨 같은 말이다. 분명코 율포는 화자에게 오롯한 경험이 곰삭아 있는 곳이리라. 오래된 서랍 속의 내밀함 같은 기억이 눅진한 곳, 그런 곳은 이미 상처도 아픔도 하나의 추억으로, 아련함으로 재생되어 현재를 잇는다. 그것은 유구한 ‘파도’와 ‘햇살’과 ‘양털구름’이 너와 나로 치환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쯤 되어야 상처를 사는 힘으로 내재화할 수 있는 것이겠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훗날 기억을 추억 정도로 회상할 수 있을 만큼만 상처를 주고 상처받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혹은 노력한다면 할머니 맘 같은, 고향 같은 그런 자세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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