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보는세상]STX의 실패와 수저계급론

머니투데이 양영권 기자 | 2016.05.31 11:30

편집자주 |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

국내 한 대기업 부장으로 있는 A 씨는 최근 전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과거의 동료 10여명은 뒤풀이 자리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들이 몸담았던 직장은 한때 재계 서열 11위까지 올랐던 STX그룹. 지금은 모두 다른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STX맨'이었다는 데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다. 회사의 슬로건을 건배사로 외친 것도 그 때문이다.

STX조선해양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STX그룹을 이끌었던 강덕수 회장은 대표적인 '흙수저'다. 상고를 나와 1973년 고졸사원으로 쌍용양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 쌍용그룹이 쌍용중공업 지분을 매각하자 전 재산 20억여원으로 지분을 인수, STX그룹을 창업했다. STX조선해양, STX에너지, STX팬오션 등 계열사를 늘려갔고 STX그룹은 재계의 판도를 흔들었다.

하지만 기존 체제가 쌓아 놓은 장벽은 굳건했다. '새로운 플레이어'인 STX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는 '해외'였다. 현재 STX의 중국 대련 조선소 건립이 무리한 투자였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지만, 국내 투자환경이 그만큼 척박했다는 사정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A 씨는 "국내에 조선소를 지으려 했지만 소음, 공해 등을 이유로 주민들의 반발이 극심했다"며 "하지만 중국 정부는 조선소를 지을 땅을 무상으로 지원한 데다 도로를 놔주고, 도크를 지을 곳의 수심이 나오지 않자 준설까지 해 줬다"고 말했다.

STX의 '해외 도전'은 이어져 2011년에는 아프리카 가나에까지 가서 20만 가구 아파트 건설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운 조선업 경기의 동반 침체 앞에 쓰러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임직원들은 '일장춘몽'이었다고 얘기한다.

'샐러리맨의 신화'는 강 회장에게 붙은 이름이었지만, 구성원들은 '샐러리맨의 로망'이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5년만에 과장을 달았던 B씨. 그는 STX를 '신입 사원들에게 복사만 시키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는 회사'로 기억한다.


"주니어들도 사업 제안을 해서 채택이 되면 책임자가 돼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기회를 줬어요.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제안이 많았고, 부서간 협업도 잘됐어요. 그 어느 회사보다 자발적이고, 역동적이었죠."

B 씨는 "누구에게 얼마만큼 몫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신화에 동참해 같이 만들어 간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회상했다.

물론 청춘을 바친 회사인데 순식간에 '루저'가 된 STX맨들은 당시 경영진에 반감도 적지 않다. STX그룹의 실패는 결국 '샐러리맨 신화'의 한계였다는게 이들의 지적이다. STX그룹 계열사 간부 출신 C 씨의 얘기다. "STX 대련 투자에 대해 한 임원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고 해요. 하지만 자신감이 강했던 강 회장은 밀어붙였죠. '정을 맞은' 사람이 나온 뒤로 누구도 충언을 하기가 부담스러워졌어요."

그러면서도 'STX맨'들은 STX의 실패만 부각되고 도전은 잊히는 게 못내 아쉽다. B 씨는 "굴지의 기업 총수조차 한번 실패하면 재기가 막혀 있는 사회인데, 청년창업자들은 오죽하겠나"라고 말했다.

사업 실패의 책임은 분명히 경영자가 질 몫이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정신과 기업가정신까지 잊어버리고 폄하하면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수저계급론'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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