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사이다' 사건, 항소심도 무기징역…법원 "유죄 증거 많아"

머니투데이 김만배 기자, 이태성 기자, 양성희 기자, 한정수 기자, 김종훈 기자, 이경은 기자 | 2016.05.21 06:00

[서초동살롱<116>]직접증거 없이도 유죄 인정된 사례…추후 대법원 판단 주목

경북 상주 농약사이다 사건의 피고인 박모씨(83)/사진=뉴스1

지난해 경북 상주의 한 마을에서 발생한 '농약 사이다' 사건, 기억하시나요. 마을회관에 모여 있던 할머니 6명이 농약이 든 사이다를 마셔 2명은 숨지고 4명은 중태에 빠진 사건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만 유일하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한 80대 할머니 박모씨가 범인으로 지목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요. 박씨는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9일 대구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이 열려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평화롭던 시골 마을, 하룻밤 새 파탄 난 사연은

경북 상주시 공성면 금계1리. 이곳은 42가구에 주민 86명이 살고 있는 평범한 시골 마을입니다. 그런 이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름이면 마을회관에 모여 초복잔치를 열고 함께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등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주민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80대 할머니 박씨에게는 마을에서 30년이 넘게 함께 지내며 어울려 온 친구들 6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을회관에서 화투놀이를 즐겨했습니다. 그런데 박씨는 이 화투판에서 속임수를 자주 썼다고 합니다.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잦아졌고 사이는 점점 나빠졌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7월13일 초복을 맞아 마을회관에서 함께 식사를 한 뒤 여느때처럼 화투놀이를 했는데 박씨가 또 속임수를 쓰자 A씨가 화투패를 집어던지고 나가버리면서 큰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화가 난 박씨는 그날 밤 몰래 마을회관에 가 냉장고 안에 있는 사이다 페트병에 메소밀 성분의 농약을 부어 섞었습니다. 다음날 박씨는 A씨의 집에 들러 A씨가 마을회관에 갈 것을 확인한 뒤 마을회관에서 다시 모인 친구들에게 농약을 부어둔 사이다를 마시도록 권했습니다. 사이다를 마신 A씨는 고통을 호소하며 회관 밖으로 기어나갔고 다른 친구들도 입에 거품을 내뿜으며 의식을 잃고 쓰려졌습니다. 그러나 박씨는 어떤 구호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한 시간 가량 지나서야 마을이장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2명은 치료 도중 숨지고 4명은 중태에 빠졌습니다.

"정황상 유죄 인정" vs "직접증거 없어 무죄" 치열한 공방

앞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이뤄진 1심에서 검찰과 변호인 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였습니다. 시골 마을인 탓에 범행과정이 찍힌 CCTV영상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웠고 범행을 직접 목격한 이도 없는 상황에서 '박씨가 사이다에 농약을 타 할머니들을 죽거나 중태에 빠지게 만들었느냐'를 입증하는 것이 쟁점이 됐습니다.

닷새간의 공방 끝에 박씨는 배심원 7명의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마을회관에서 문제의 사이다 페트병이 박카스 뚜껑으로 닫혀 있었고 이 병에서 메소밀 성분이 검출된 점, 박씨의 집에서 뚜껑이 없는 박카스 병과 메소밀 성분이 발견된 점, 박씨의 옷과 전동차, 지팡이 등에서 메소밀 성분이 검출된 점, 피해자들이 쓰러졌을 때 박씨가 구조조치를 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아무일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 점 등이 근거가 됐습니다.


그러나 박씨 측은 범행 동기, 농약 투입 시기, 고독성 살충제 구입경로 등 명확한 직접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형사소송법 307조 2항은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객관적 증거가 부족할 경우 정황 증거를 살인사건의 유·무죄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로 사용해 왔습니다. 2011년 발생한 '한국판 O.J. 심슨 사건'으로 불렸던 '만삭 의사부인 살인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임신 9개월이었던 백모씨의 부인이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타살을 증명할 직접증거가 확보되지 않았고 법정에서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엇갈린 1·2심 판결 끝에 부부싸움으로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는 정황증거를 받아들인 대법원 재상고심이 남편을 유죄로 인정,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반면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낙지를 먹다 질식사한 것처럼 속여 보험금을 타낸 혐의로 기소된 '낙지 살인사건' 피의자의 경우 애초에 사고사로 종결됐고 여자친구의 시신이 사망 이틀 후 화장돼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이때문에 박씨에 대한 2심 판결이 더욱 주목됐습니다. 지난 19일 대구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1심과 같이 박씨에게 유죄를 인정,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형사재판에서 간접증거를 근거로 유죄를 인정할 때 그 간접증거가 개별적으로는 범죄사실에 대한 완전한 증명력을 갖지 못하더라도 전체 증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증명력이 인정되면 범죄사실이 인정된다'는 대법원의 판례를 따른 것입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박씨가 범인임을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며 "그 증거 하나하나로는 박씨의 유죄를 인정하기에 부족할 수 있어도 그 증거를 다 모아놓고 봤을 때 박씨가 범인임을 입증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어 "평범한 시골마을이 이 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됐다"며 "이웃들끼리 이제는 물 한잔도 권하지 못할 정도로 공동체가 붕괴했고 현재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그럼에도 박씨는 범행을 부인하며 피해회복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의 형이 부당할 만큼 무겁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치열한 공방을 거쳐 1·2심 모두 유죄를 인정한 가운데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해온 박씨가 대법원의 판단을 요구할지, 그렇게 된다면 대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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