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비둘기 안에 매의 어두운 숲 드러내고파"

머니투데이 박다해 기자 | 2016.05.16 03:14

[인터뷰]'종의 기원'으로 3년 만에 컴백…"악인은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작가 정유정이 3년 만에 신작 '종의 기원'을 펴냈다. 그는 '1인칭 사이코패스' 소설인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악'(惡)의 모습을 낱낱이 파헤친다. /사진=김창현 기자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의 작가 정유정이 3년 만에 신작 '종의 기원'으로 돌아왔다. '악'(惡)에 대한 그의 탐구는 더욱 집요해졌고 가장 내밀한 인간의 본성에 더 깊숙이 다가갔다.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인 주인공 유진을 둘러싼 단 3일간의 이야기다. 어느 날 새벽, 집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어머니가 발견되고 그 누군가를 밝히며 진실이 드러난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유정은 "'종의 기원'을 쓰며 이야기를 세 번이나 완전히 부수고 새로 썼다. '내 심장을 쏴라' 이후 처음"이라고 털어놨다.

"주인공 유진은 피바다에서 눈을 뜬다. 다섯 번의 살인이 있다. 의형제 해진이 죽는다." 초고부터 탈고까지 유지된 골조는 이 세 지점뿐이다. 악을 '객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악'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이야기를 해체하고 다시 만드는 과정이 반복된 이유다.

"초고를 쓰고 나서 읽어보니 주인공이 생명력이 없는 거예요. 그냥 학문적인 사이코패스에 가까웠죠. 시니컬하고 감정도 없고…. 그런데 사이코패스라고 감정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단지 감정으로 행동이 결정되지 않을 뿐이죠."

이야기 구조를 모조리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쓴 두 번째 원고는 훨씬 부드럽고 재미있었지만 주인공 유진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작품을 쓰면서) 인물 형성에 실패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상태로라면 제가 (이야기를) 못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유진을 제 안으로 불러오지 못한 거예요. 제 윤리관을 그대로 두고 머리로만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쓰니까 주인공의 생명력이 사라진거죠."

그렇게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체했다. 가장 간단한 설정, 가장 짧은 기간, 가장 비좁은 공간만 남겨두고 유진에 집중했다. 스스로 유진이 돼야 했다. 가치판단의 기준을 도덕이 아닌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이 옳은가 아닌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가 있는가'가 기준이 됐어요. 평소 지니고 있던 윤리의 틀을 완전히 무너뜨렸을 때, 비로소 막힘없이 글을 써내려갈 수 있었어요."

마지막까지 깨기 힘들었던 도덕적 기준은 바로 '엄마'에 관한 것이었다. 유진이 이미 잘린 엄마의 목에 다시 한 번 면도칼을 꽂아보는 순간,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여러 번 뒤엎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실용'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유진이라면,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장면을 그대로 살렸다.

정유정은 사이코패스인 주인공 유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윤리적 기준을 무너뜨려야 했다. 도덕이 아닌 실용적인 관점에서 가치판단을 할 때 비로소 유진이 될 수 있었다. /사진=김창현 기자

'내 심장을 쏴라'의 점박이, '7년의 밤'의 오영제, '28'의 박동해. 정유정의 작품엔 언제나 악을 표상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잔혹할 정도로 치밀한 묘사다.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의 본성을 기어코 끄집어내 정면에 세운다. 그는 왜 이토록 불편한 주제에 집중하는 것일까.


"제가 이런 소설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간접경험이에요. 현대사회는 마녀사냥이나 명예 살인이 벌어졌던 중세보다는 안전하지만 여전히 비둘기 집단에 들어온 매처럼 '포식자'들이 있단 말이에요. 책을 통해 포식자들을 보여줌으로써 삶과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는 거죠."

그는 평범한 비둘기라고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불편한 이야기를 통해 매의 입장에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야 이해도 되고 대처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상상력을 주고 싶었어요."

'종의 기원'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인물은 바로 죽은 형 '유민'을 대신해 양자로 입양된 '해진'이다. 형의 역할을 하면서 때론 병풍처럼 유진의 뒤를 받쳐준다. 유진이 '악'이라면 해진은 '선'을 표상한다. 정유정은 악과 선이 공존하는 인간의 본성을 각각 유진과 해진을 통해 표현해냈다.

작가는 전부터 '1인칭 사이코패스'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28'이 출간된 뒤 슬럼프에 빠졌다. 2013년 가을, 무작정 히말라야로 떠났다. 다녀오고 나니 비로소 무언가를 써 볼 힘이 생겼다. 이듬해 2월, 이번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 980km에 이르는 길을 혼자서 걷고 또 걸으며 시놉시스를 완성할 수 있었다.

쉼 없이 달려온 3년, 이번엔 파타고니아 트레킹이나 사막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몸을 혹사해야 정신을 차리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소설가는 몸에도 머리에도 근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그 희열이 또 다른 에너지가 된다는 것.

정유정은 최근 카카오를 통해 선보일 예정인 '종의 기원' 외전을 마무리했다. 형제 유진과 유민의 어릴 적 이야기로 웹툰 작가와 함께 작업했다. 영화화를 위한 판권 작업도 진행 중이다.

그의 다음 작품은 '28'과 같은 재난물이다. 판타지적인 요소를 집어넣었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소재는 '인간' 그 자체다. "가장 지저분한 일부터 존엄한 일까지 하는 것이 인간이잖아요. 때론 현실이 상상을 초월하고요."

그래서일까. 정유정은 자신을 '장르문학' 혹은 '경계문학'으로 분류하는 시선을 거부한다. 단지 '이야기'를 쓸 뿐이라고 했다. 그에게 이야기는 곧 '인간의 본성'이자 '삶에 대한 은유'다. 인간에 대한 그의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이야기도 계속될 것이다.

정유정은 카카오를 통해 '종의 기원' 외전을 웹툰 형태로 선보일 예정이다. 영화화를 위한 판권 작업도 진행 중이다. 그는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에 "감동적"이라고 전했다. /사진=김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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