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뭉근한 나이테로 사람을 받아주는 춤시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6.04.30 03:07

<46> 김리영 시인 ‘춤으로 쓴 편지’

편집자주 | '시인의 집'은 시인이 동료 시인의 시와 시집을 소개하는 코너다. 시인의 집에 머무는 시인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감상하고, 바쁜 일상에서도 가깝게 두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시와 시집을 소개한다. 여행갈 때,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시 한편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일, 시 한수를 외우고 읊을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갖는 것 또한 시인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춤을 추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춤에서 시의 영혼을 길어 올리는 시인, 화려한 춤사위를 시로 승화시키는 시인, 이 얼마나 근사한가? 무용가 김리영 시인(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의 네 번째 시집 ‘춤으로 쓴 편지’는 춤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어 역동적일 것 같지만 의외로 차분하다.

이런 차분함은 시인의 연륜에서 기인한다. 춤꾼으로서 “날짜변경선 넘어 크리스마스를 보”(이하 ‘우음도 1’)낸 시인에게는 무대에 올라 춤사위를 보여주는 시간보다 무대 아래에서 다른 이의 춤을 보는 날들이 더 많을 것이다. 무대에서 청춘을 다 보낸 시인은 “고름 풀어헤치고/ 신발 벗겨지고 솟아오를 언덕 없는 허허벌판” 같은 허전함을 느낀다.

춤꾼으로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으나 이제 시인 곁에는 휘황찬란한 조명도, 우렁찬 박수도, 뜨겁게 포옹해주던 사람도 없다. 다들 “모두들 극지방의 오로라”(이하 ‘모래 한 알’), 즉 또 다른 춤꾼을 찾아 떠났다. 시인에게 남은 것은 평생 “허리춤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노란 모래” 한 줌, 춤과 시를 향한 갈증일 것이다.

춤꾼에서 시인으로 방향을 전환한 시인의 영혼은 목마르기만 하다. 그 결핍은 시적 갈망이기도 하고, 희망일 수도 있다. 연륜이 쌓인 시인이 피우고자 하는 꽃(시)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잡풀 사이 흰색 작은 꽃”이다. “기름진 흙이 아닌, 모래 틈에 솜털 박고/ 꽃자루에서 내려와 한참을 기어가도 비스듬히 누워 피고 쓰러지지 않는 꽃”이다. 이제 시인은 무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와 보잘것없는 것들과 공존하려 한다.

동부간선도로 중랑천에는 왜가리가 산다
검은 댕기 들인 늠름한 왜가리들
얕은 물가에 나가 고기 잡아 올리는지
꿈쩍도 안 하고 햇살 쏘이는
늙은 왜가리의 흐무러진 머리깃털

한 발로 서 있는 기분 아시나요
갈매기들이 세력다툼에 밀려와 먹이 뜯고
숨 막혀오고, 앞날이 안 보여요

목까지 차오른 이야기들 털어내고

칙칙한 아파트 숲 향해
흰 한삼 흔들며 외친 왜가리는
낙양성 신선 도니는 배꽃 피어난 정자로
이제 막 떠났을까?

-‘왜가리야 왜가리야’ 전문

춤꾼으로서 “3분 34초 공연 시간이”(‘춤으로 쓴 편지’) 거의 흘러갔지만 시인에게 춤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춤은 시와 더불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부간선도로를 지나던 시인은 중랑천에서 “흰 한삼 흔들며”(이하 ‘왜가리야 왜가리야’) “한 발로 서 있는” 왜가리를 보고 춤과 시를 떠올린다. 시인은 갈매기들과 먹이 다툼을 하느라 “숨 막혀오고, 앞날이 안 보”이는 왜가리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하소연을 “칙칙한 아파트 숲을 향해” “목까지 차오를 이야기들을 털어”낸다.

김리영 시인에게 춤과 시는 숙명이다. 그전까지의 춤이 “금박쾌자에 가슴띠 두르고 등장”(이하 ‘춤으로 쓴 편지’)한, “발밑에 밟혀오는 뜨거운 활자” 같았다면 지금부터의 춤은 “천 년 넘게 물안개에 젖은 사람을 안아주는 춤/ 뭉근한 나이테로 사람을 받아주는 춤”(이하 ‘레드우드’)이다. “춤출 수 있던 나이에/ 떠나가고, 다시 돌아”와 “남아 있는 뼈를 세며 아프게 연습”한 춤이다.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자세를 낮춘 춤이면서 한 줌의 모래로부터 피워 올릴 꽃(시)인 것이다.

◇ 춤으로 쓴 편지=김리영/북인/116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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