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입식 고전’대신 재미·도전·파격으로 승부…‘길 위로’ 부상한 인문학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 2016.04.27 03:18

문체부-한국도서관협회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2013년 2만명→2016년 9만명으로

서대문구립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참가자들이 문학과 건축의 상관관계를 인문학적으로 푸는 강사의 강의를 듣고 있다. /사진제공=한국도서관협회

미국 소설가 잭 케루악이 1957년에 발표한 ‘길 위에서’(on the road)는 악한(惡漢) 소설이다. 기성 사회의 규칙을 비웃고 목적 없이 떠도는 감각의 삶만을 좇는 비트 세대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때론 위태로워 보이고, 때론 좌절에 가까운 이 작품이 다가가는 목적은 자유와 자기만족이다. ‘길 위에선’ 기성세대와 비트 세대가 공존하고, 보수와 자유가 만나며 감각과 이성이 부딪힌다.

‘길 위에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열린 세상과 조우하는 셈이다. 인문학이 위기를 거쳐 열풍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태도는 일방향이었다. 무지를 깨운다는 명목으로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

지난 2013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도서관협회가 시행하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강좌와 체험을 결합한 쌍방향 소통의 창구다. 받는 가르침에 한정하지 않고, 강연에서 얻은 지식을 지혜로 활용하기 위한 체험이 덧붙여져 인문학의 정의를 새롭게 꾸민다. 인문학을 새로운 접근법으로 푸는 태도는 케루악의 숨겨진 감각을 드러내는 작품의 속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이 준비한 인문학 강의. 이 프로그램에는 강연뿐 아니라 체험 학습 시간도 마련돼 있다. /사진제공=한국도서관협회

올해 ‘길 위의 인문학’…17개 도시, 320개 도서관, 2800회 프로그램

문체부와 한국도서관협회는 올해 전국 17개 시도에서 320개 도서관을 최근 선정해 인문강좌와 체험 활동을 연계한 프로그램을 2800회 운영할 예정이다.
지난 3년간 이 사업이 대중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올해 사업은 인문학을 통한 삶의 의미 있는 변화에도 관심을 두며 내연의 폭을 넓히고 있다.

2013년 첫 사업에선 121개 도서관이 594회 프로그램을 통해 2만 1977명을 모았지만, 올해는 320개 도서관이 2800회 프로그램으로 9만 명 이상의 참가 인원을 예상할 정도로 규모가 곱절로 커졌다.<표 참조>

‘인문학의 재구성’…재미의 ‘청소년 대상’, 도전·패기의 ‘장애인 대상’

사업에 참여한 도서관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은 재미와 감각으로 철저히 무장했다. 청소년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주입식 교육’은 온데간데없다. ‘청소년, 도서관에서 작가를 꿈꾸다’(인천서구도서관)에선 시나 소설의 전통적 작가에 한정하지 않는다. ‘웬툰작가’, ‘여행작가’, ‘방송작가’ 등에 대한 강좌를 듣고 웹툰 공작소나 라디오 스튜디오 등을 찾아간다.


남양주시 화도도서관이 준비한 ‘예술, 인문학과 통하다’에선 미술을 테마로 인문학을 되돌아본다. ‘마티스(다빈치, 고흐 등)처럼 해보기’를 통해 실습하고, 작품 속 숨겨진 인문학적 이야기를 듣는다.


장애인을 위한 자기계발 프로그램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유니버설 인문 코끼리’(서초구립반포도서관)에선 시각장애인이 시각예술프로그램을 해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시간을 준비했다. ‘지식채널e로 보는 지식과 생각의 힘’, ‘이미지 읽는 법’ 같은 깊이 있는 인문학 프로그램들도 즐비하다.

‘눈 감으면 보이는 세상’을 준비한 노원어린이도서관은 장애인에게 카메라를 다루는 방법 및 사진 이론 같은 프로그램을 준비해 그들의 오감이 지닌 능력을 새롭게 발견한다. 탐방 프로그램으로 시각장애 예술 전용 갤러리도 들른다.

장애인을 비롯해 노인층 대상 자서전 쓰기, 다문화 가정 및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35개관에서 진행된다.

지난해 경상북도립성주공공도서관이 준비한 강연 뒤 체험 학습.

‘파격 인문학’…고전 뒤집고 서로 섞고 좋은 동네 만들기 프로젝트까지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 즐기는 독특한 인문학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사이다 인문학’(신탄진평생학습도서관)은 관념적인 고전 읽기 같은 지루함에서 벗어나 ‘표현 인문학’에 집중한다. 드라마, 연극, 만화 같은 대중문화를 통해 새로운 인문학적 관점을 제시하는 셈이다.

김은진 사서는 “가장 많이 접하는 대중문화에서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인문학 강의가 필요했다”며 “몸으로 실천하는 인문학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생물학과 인문학의 만남’(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 ‘새롭게 읽는 파격의 우리 고전’(청주오송도서관) 등 융합 또는 파괴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식스 센스’, ‘쇼생크 탈출’, ‘인셉션’, ‘이터널 선샤인’ 같은 명화 속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싶다면 ‘토닥토닥 시네마 인문학’(강동구립강일도서관)을 놓칠 수 없다.

‘걷는 동네, 마을의 기록’(교하도서관)은 인문학, 그 이상의 테마를 숙제처럼 안고 들어온 프로그램이다. 도서관이 재개발로 이주민이 비율이 높아진 신도시에 어떤 공동체 문화가 형성돼야 하는지 모색하는 역할을 인문 프로그램을 통해 제시하기 때문. ‘마을 살이’ 강연뿐 아니라, 지역 문화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탐방하면서 좋은 동네와 소통의 문화를 고민한다.

지난해 삼척교육문화관에서 참가 학생들이 방송 현장을 경험하고 있다.

‘골라 듣는 인문학’…저녁 시간 확대, ‘문화가 있는 날’ 연계

도서관 38개관은 직장인에게 더 많은 참여 기회를 주기 위해 저녁 시간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고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과 연계해 운영한다. 프로그램 참가 희망자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www.libraryonroad.kr)에서 일정별, 지역별 정보를 확인한 후 신청할 수 있다. 이들 프로그램의 참가비는 무료다.

문체부 관계자는 “올해 시행 프로그램은 강좌와 탐방을 모두 경험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흥미를 넘어 의미 쪽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며 “무엇보다 다양한 세대를 만족시키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프로그램이 늘어난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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