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방원'의 굴레, 누가 벗겨주었나?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6.03.26 03:10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39 - 조준 : 정도전과 대립하고 이방원을 후원하다

"정도전, 죽여야겠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이 창백한 얼굴로 나직하게 읊조린다. 이른바 '킬방원'의 각성! 왕자의 난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스승 정도전과 세자 방석, 그리고 함께 조선을 세운 옛 동지들이 그의 칼에 쓰러졌다.

또 임금이 된 다음에는 아내 원경왕후의 동생들을 황천길로 보내버린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죄가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어찌 보면 시대가 그들을 죽음으로 떠민 것이다. '킬방원'은 바로 그 시대의 화신이었다.

이방원이 악역을 자처한 것은 개인적인 권력욕때문만이 아니었다. 왕조 창업 초기에 권력이 누군가에게 쏠리거나 사적으로 남용되는 것은 나라를 흔드는 일이었다.

이방원은 왕가의 일원으로서 권력지도를 바로잡았고 끝내 새 나라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문제는 그이의 손에 묻은 피였다. 이 피가 정당함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끌고가기가 어렵다. '킬방원'의 업보를 풀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 일을 해준 인물이 조준이었다.

조준은 조선의 건국에 크게 기여한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근래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그의 공이 묻혀 있었는데 알고 보면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조준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잡자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단숨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권문세족이 토지를 사사로이 겸병(兼幷 : 중복해서 빼앗는 것)하는 폐단을 지적하고 나라의 땅을 백성과 관헌에게 골고루 배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전(私田)이 주(州)와 군(郡)을 삼키고, 산과 내를 경계로 삼는 지경입니다.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되고, 1년에 조세를 받는 회수가 팔구 차에 이릅니다.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토지는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해치니,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또 (국고가 비어) 왜놈들이 깊숙이 들어와 천리에 시체가 뒹굴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고려사절요)

조준의 개혁안은 난맥상의 핵심을 찌르면서 역성혁명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정도전이 이성계와 교감하며 새 나라의 틀을 짰다면, 조준은 민심을 모으는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조선 건국과 함께 일등공신 반열에 올라섰다. '평양백'의 봉작을 받고 정승이 되었다.


그러나 '봉화백' 정도전이 전권을 틀어쥐자 조준은 입장을 달리 했다. 방석의 세자책봉에 반대하고 이방원을 편들고 나섰다.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비판하며 정도전의 대척점에 섰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조준은 대소신료들을 이끌고 거사가 불가피했다는 공론을 모아냈다. 사실 당시 조정에는 정도전의 독주를 마뜩치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이러한 정서를 파고들며 공감을 얻어내고 정변을 수습했다.

왕자의 난이 조기에 기정사실화되자 이성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준의 노력은 자칫 패륜으로 몰릴 수도 있었던 이방원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킬방원'의 업보를 풀고 새 나라를 궤도에 올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이방원은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1400년 정종이 재위할 때 조준이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겼다. 그가 이거이를 찾아가 사병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유했다는 혐의다. 마침 이방원이 사병혁파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을 무렵이라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무고라고 일축하고 기꺼이 감옥에서 꺼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둘째딸 경정공주를 조준의 아들 대림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조준은 임금이 된 이방원을 받들며 영의정을 지내다가 1405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 후 부마 조대림이 목인해의 역모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 태종은 사헌부의 거듭된 탄핵에도 불구하고 조준의 아들에게 살 길을 열어줬다.

역모의 기미만 보여도 일단 죽이고 봤던 그이의 성정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조치였다. 태종은 '킬방원'의 굴레를 벗겨준,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에게 사후에도 의리를 지켰다.

베스트 클릭

  1. 1 남편·친모 눈 바늘로 찌르고 죽인 사이코패스…24년만 얼굴 공개
  2. 2 "예비신부, 이복 동생"…'먹튀 의혹' 유재환, 성희롱 폭로까지?
  3. 3 나훈아 '김정은 돼지' 발언에 악플 900개…전여옥 "틀린 말 있나요?"
  4. 4 불바다 된 LA, 한국인들은 총을 들었다…흑인의 분노, 왜 한인 향했나[뉴스속오늘]
  5. 5 계단 오를 때 '헉헉' 체력 줄었나 했더니…"돌연사 원인" 이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