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내에서 정치 성향으로 김구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김구를 빨갱이로 몬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김구는 임정 내 우파의 대부였다. 의열단 단장이자 임정 국무장관을 맡은 김원봉이야말로 좌익 독립운동가의 대표 인물로 꼽힌다.
김원봉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현상금이다. 김구에 걸린 현상금은 당시 돈으로 60만원 정도, 김원봉에 걸린 현상금은 100만원 이었다고 한다.
김원봉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중국 서간도로 넘어가 12월 의열단을 조직해 조선 총독 등 일본 수뇌부와 친일파 무리를 암살하며 일본을 벌벌 떨게 한 인물이다. 일본이 김원봉을 잡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됐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영화 속에도 김원봉의 활약이 나오지만, 그는 절대 잡히지 않고 해방을 맞는다. 하지만 그는 월북했다. 친일 출신 경찰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빨갱이로 몰리며 온갖 수모를 당한 그로서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그는 끝내 숙청당하고 무덤조차 확인할 길 없다. 월북 독립운동가에는 서훈을 내리지 않은 우리 정부의 원칙상 김원봉은 의열단의 대장으로 교과서에 나올 뿐 잊혀가는 독립운동가가 됐다.
3월 24일부터 4월 4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진전이 열린다. 여기에는 김구 중심의 임정이 아닌 36년간 임정 하에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인물과 당시 임정들이 담긴 사진이 전시된다. 김구, 이승만 외에도 김원봉 등 우리가 모르고 외면한 많은 임정 인물을 통해 임정을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다.
3년 후인 2019년은 독립만세운동 100년이고 임정 수립 100년을 맞는 해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잊지 않고 후세에 알려야 할 많은 독립운동가조차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있다.
‘임시정부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부터 개탄스럽다. 기자가 되고 첫 출장을 갔던 1994년, 목적지는 중국 상하이, 선전 등지였다. 상해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은 짬을 내 임정 사무실에 들렀다. 삐걱거리는 계단, 다 쓰러질 것 같은 당시 건물에 충격을 받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중국 정부는 그 임정 사무실을 유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변이 재건축으로 수백억 호가하는 아파트가 들어서도 그곳은 개발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 방중에 그곳에 들려 “이곳이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말했다던가.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 중국 상하이에 만든 우리 정부. 땅은 중국의 것일지 모르지만, 임정의 역사와 정신은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임정 관련 정보와 그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관 하나 만들지 않고 있다. 민간에서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보훈처로부터 법인(법인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설립 허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법인 설립이 돼야 최소한 모금활동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대신 물었다. 보훈처 실무 담당자는 “취지야 당연히 동감한다"면서도 "어디다 얼마의 돈을 들여 세울 건지 구체 계획이 없으니 무작정 법인 설립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법인을 만들어 모금도 하고 예산을 만들어보자는 취지 아니냐. 정부 예산으로 할 계획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서 왜 도움조차 주지 않는가”라고 되물었지만 “바빠서 다음에 통화하자”란 답만 돌아온다. 누군가 땅이나 돈을 기부하지 않으면 추진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다시 3월 1일이다. 정작 우리는 하루 기념일을 챙기는 것만으로 그치지만, 3.1 만세운동은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연구하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진 민중항쟁이다. 그리고 그 만세운동의 힘으로 만든 임정의 건국강령과 지도이념은 대한민국 헌법으로 계승됐다.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운 유명, 무명용사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 임정의 건국강령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는지, 긍지보다 반성의 무게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3.1절’이 100년을 향해가고 있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