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섬, 나만의 공화국에 혼자 사는 소년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6.02.27 03:10

<38> 허연 시인 ‘오십 미터’

강은 뭍과 뭍을 갈라놓는 선이다. 뭍의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물의 경계다. 그 경계선 위에 섬 하나가 떠 있다. 아니, ‘하구 모래톱’이 쌓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섬이다. 그 섬은 시의 보호구역인 동시에 시인만의 공화국이다. 양쪽으로 갈라진 강과 탁 트인 바다 그리고 새발자국이 찍힌 섬의 모래톱은 시를 기다리는 시인의 사색 공간이다.

그런데 고요해야 할 강과 섬에 폭우(장마)가 지나간 뒤 죽음이 난무한다. “누구는 몸을 던졌고 누구는 떠올랐고, 누구는 몇 달을 못 갈 사랑을 읊조렸”(이하 ‘제의(祭儀)’)으며, 병든 고양이는 “마지막 제물이” 되고 만다. 시인 공화국은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고, “슬픔도 기쁨도 없다”. 오로지 “쓸려갈 것과 남은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허연 시인(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의 네 번째 시집 ‘오십 미터’는 강(물)과 섬 그리고 선(線) 위의 삶을 소멸과 하강하는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강물이 늘 아래로 흘러가듯 사랑도 “몇 달 못” 가는 허무할 뿐이고,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생은 나를 삼키고 있”(‘행성의 노래’)듯이 생(生)을 제물 삼아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시작작품상을 수상한 ‘장마의 나날’은 이를 잘 보여주는 시다.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 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상소 한 통 써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일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습니다. 쓸어 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모르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장마의 나날’ 전문

인생처럼 강물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강변 모래톱에는 글씨를 쓸 수 있지만 강물에는 쓸 수가 없다. 다 쓰기도 전에 흘러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세월에 사연을 적은 사랑도 마찬가지다. 치열하게 사랑을 했지만, 이제 사랑은 식어버렸다. 강물처럼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으므로 “강물에게는 기록 같은 건 없”다고 시인은 단언한다. 그래서 “강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떠나보낼 게 많은 사람”이라는 명제는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말을 만나면서 더욱 빛이 난다.

“무엇이 되든 근사하”(이하 ‘오늘도 선을 넘지 못했다’)다면서도 “선을 넘지 못”하는 시인의 주된 관심사는 강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매일 들여다보는 상처 많은 강물이다. 강물의 상처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강물을 속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시인이 강물을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건, ‘사람의 일’에는 흘리지 않고 ‘강물의 일’에만 눈물을 흘리는 건 강물이 빠르게 흘러 기록되지 않는 속성 때문이다. 강물에 비친 “어떤 것과도 몸을 섞지만 어떤 것에도 지분을 주지 않”(이하 ‘강물의 일’)고, 강 저쪽에 대해 “고질적으로 무심”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인 스스로 찾아들어간 섬은 대양 한가운데 있는 게 아니라 도시와 가까운 강과 바다 사이에 있다. 따라서 시인이 구축한 공화국은 ‘나만의 절대공간’이 아니다. 가족과 직장 사이의 도피처와도 같은 그곳은 나와 사람들과의 거리, 세속과 탈속의 거리이면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오십 미터’다. 그 거리에서 시인은 천생 소년으로 살고 있다.

◇ 오십 미터=허연 시인. 문학과지성사. 141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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