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는 넷인데 둘은 누구 것"…'처용'은 뒤통수 맞은 남편이 아니었다

머니투데이 김유진 기자 | 2016.02.20 03:10

역병 물리친 난세의 영웅, '처용'의 춤…세종이 한글 원리 담은 '오방처용무'로 재창조

편집자주 | 일상에 흩뿌려진 삶의 방식들이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면 '유산'이 됩니다. 무형문화유산은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즉 형태가 없는 유산이지요. 눈으로만 봐야 하는 유형유산과 달리, 무형유산은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을 다 사용해야만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답니다. 그만큼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접하기 어렵지만 진짜 우리의 문화, 즉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 전해져 온 오랜 이야기는 유형유산보다는 무형유산에 훨씬 더 짙게 배어있습니다. 두 발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축된 이야기가 담긴 삶의 터전을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 전통 무용 '처용무'. /사진제공=유네스코


역사에서 한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다는 것은 백성들이 매우 고통받았음을 의미한다. 조선에 무너지기 직전의 고려가 그랬고, 고려에 무너지기 직전의 통일신라가 그랬다. 탐관오리가 날뛰었고 백성들은 굶거나 역병에 걸려 죽었다.

난세의 영웅 '처용'(處容)은 그렇게 탄생했다. 통일신라 말기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 법한 막장 사연의 민간 설화와 함께 탄생한 처용. "집에 와 방문을 여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아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그를 단순히 뒤통수 맞은 남편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처용은 민간 영웅이었다. 당시 찬밥 신세였던 육두품 출신이 가장 무서운 적이었던 역신(病)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훠이훠이, 역병아 물럿거라" 했던 처용의 춤사위. 백성들은 집마다 처용의 탈을 걸어두고 역신이 지나가기를 빌었다.

◇ '깨어있는 왕' 세종, 민간 신앙을 궁중에 들이다

처용무의 시연 장면이 담긴 조선시대의 그림. /사진제공=유네스코

500여 년 뒤 '형제의 난'을 겪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 세종. 아버지가 불모지를 갈아엎어 만들어 둔 새 땅에 똑똑한 아들은 '예악(禮樂, 예법과 음악)'이라는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조선이 건국 이념으로 선택한 유교사상을 깊게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세종은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처용무'가 선택됐다. 백성들이 역병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는 처용무를 궁중에 들여 즐거움뿐만 아니라 민심까지 얻고자 한 것이다.

세종은 1인 춤이었던 처용무의 인원을 5명으로 늘리고, 사람마다 방향을 부여해 '오방처용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무용수들은 음양오행설의 원리를 따라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상징하는 색깔인 청홍황백흑(靑紅黃白黑) 옷을 입었다.

이렇게 세팅을 완료한 뒤 세종의 퍼즐 놀이가 시작됐다. 세종은 이 5명의 춤꾼이 모이고 흩어지는 모습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구현해냈다. 같은 원리로 한글을 창제했듯 처용무라는 춤을 만들어낸 것이다.

◇ '흥청망청'의 유래가 처용무였다?

궁중무용 가운데 유일한 가면무인 처용무는 세종의 뒤를 이은 왕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특히 연산군은 처용무를 너무나도 즐긴 나머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춤추는 사람을 모두 기녀로 바꿔라. 탈은 여자들이 쓰기 좋도록 가볍고 편하게 만들고, 붉은 낯빛도 살빛으로 바꿔라!"

연산군은 전국에서 기녀 '흥청(興淸)'과 '운평(運平)' 1000명을 모아들인 뒤 이들이 처용무를 추게 했다. 연산군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밝은 대낮에 흥청들의 옷을 죄다 벗기고 갖은 난잡한 몸짓을 다 부리며 처용무를 추게 했고, 나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합행위를 하려 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내시 김처선이 "임금을 오래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늙은 놈이 여러 임금을 섬겼지만 고금을 통해 상감처럼 하신 분은 없었습니다"라고 충언을 했다가 다리를 잘리고, 혀가 잘려 호랑이 밥이 된 일화는 유명하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예언대로 몇 개월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 물러났다. 중종은 나라를 망친 춤이라는 이유로 처용무를 금지했고, 한동안 처용무는 무대에 오를 수 없었으나 후대 왕들을 통해 다시 이어졌다.

◇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딛고 살아난 처용

조선 왕실의 음악 기록서였던 '악학궤범'에 나온 방식 그대로 복원한 처용무 복장. /사진=김유진 기자 yoojin@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상당수의 우리 문화재가 명맥이 끊겼다. 처용무를 추던 사람들 또한 전쟁통 속에서 춤을 계속 출 수 없었고, 관련된 상당수의 기록이 불타거나 도난당했다.

그러나 성종이 남긴 '악학궤범' 속의 자세한 기록 덕분에 해방 이후 처용무의 부활이 가능했다. 옷 치수부터 탈 제작법, 춤을 어떻게 추는지까지 처용무에 관한 모든 것이 자세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처용무는 지난 1971년 제39호 중요무형문화재에 올랐고,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현재는 전국에 김용, 김중섭 두 사람의 기능보유자가 제자들을 양성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용 처용무 보유자는 "처용무에 담긴, 인간이 누구고 자연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우리의 철학은 지금도 유효하다"며 "현대의 정서에 맞는 해석을 더하고, 재미있게 재구성해서 널리 확산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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