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 가게 주인들에게 패배한 나폴레옹

머니투데이 김준형 부국장 | 2016.02.16 15:15

편집자주 | 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네델란드 제국을 세운 건 네델란드라는 국가가 아니라 상인들이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동인도회사와 같은)가게 주인들의 나라'라고 비웃었지만 결국 그 가게 주인들에게 패배했다. 가게 주인들이 세운 제국은 역사상 최고의 제국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쓴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한 귀절이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은 정부가 장삿꾼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최대 금융사기인 '미시시피 거품'을 겪으면서 프랑스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유럽 자본이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금리가 높아졌다. 요즘으로 따지면 신용등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권좌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망하는 길로 들어섰음을 알게된다. 예산의 절반이 이자 내는데 들어갔다. 1789년, 150년간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그가 소집, 프랑스 혁명의 길을 열어 줄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개성에서 돈을 벌던 124개 가게 주인들이 가게를 잃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늘 국회연설에서 개성공단 현지 우리 기업과 근로자들의 안위를 위해 긴급하게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시설과 많은 원부자재 재고를 남겨두고 나오게 된 걸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기업인들이 개성에 남아 있고, 자산을 빼 오지 못한 상황에서 폐쇄 발표를 하는게 기업인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한 불가피한 조치였을까. 국민들의 안위를 뜬눈으로 걱정했다면, 북한에 알리기 전에 기업인들이 자산을 빼내 올 시간을 최대한 벌어줬어야 한다.

어제 저녁 자리에서 만난 어느 인사는 미·일과의 모종의 불가피한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결정을 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혹자는 개성공단에 있는 124개 기업이 대북정책보다 중요할 수 있느냐고 한다.
124개 기업이 중요하지 않다면 1240개 기업도, 12400개 12만4000개 기업도 중요하지 않을수 있다. 단 한명의 재산과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하는게 국가 아닌가. 정부가 결정하면 기업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것이다.

어느 언론은 어차피 '고위험 고수익'을 노리고 들어간 사람들 아니냐며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항의를 질타했다.
'고위험'이 아니라고, 어떤 일이 있어도 공단이 폐쇄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건 남북한 정부다. 통일운동을 하려고 개성공단에 들어갔으면 모르되, 고수익을 노리고 들어가는 건 기업인으로선 당연한 일이다. 그걸 비난하거나, 손해를 감수하라고 하는 건 시장의 논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만큼 돈 벌었으면 됐지 않느냐"는 말도 들린다.
개성공단의 중소기업에게 "그만큼 돈 벌었으면 국가를 위해 좀 희생해도 된다"고 한다면, 삼성전자 현대차 같은 대기업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나라 태어난 덕에 월급 꼬박꼬박 모아서 먹고는 살만 하게 된 우리 모두에게 해당 될 수 있는 무서운 국가주의다.

하루라도 시간을 달라고 한 기업인들의 호소를 단호하게 자르고, 기업인들에게 통보한 지 두시간 뒤에 폐쇄 발표를 했어야 할 만큼 시급한 상황이었을까. 사흘 말미를 줬던 2013년의 경험이 왜 이번에는 적용되지 않았을까.


정부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라고 말한다.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자 하는 정치적 고려가 경제 논리를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장경제를 운영하는 국가의 진정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 기준은 '국가·정부의 신뢰'가 돼야 한다.

개성공단 폐쇄 조치가 불가피했느냐의 문제는 말 그대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일수 있다.

국제사회가 '세컨더리 보이콧'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우리는 '뒷돈'을 대 주냐는 모양새가 궁색했을 것이다.

그 돈이 핵개발에 들어갔는지,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우리 돈이 없었으면 북한 정권이 어디서든 벌충했어야 하는 돈인데, 돈에 꼬리표가 안 달린 이상 핵개발에 들어간 거라고 봐도 이상할게 없다.

남북 경제협력도 결국은 '지렛대'를 얻기 위한 것인데, 개성공단이라는 지렛대를 언젠가는 써야 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지렛대가 별로 효과가 없다면, 너무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백번 양보 해도 그 방식은 정부의 '신뢰 자본'에 큰 생채기를 낸 것이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경제주체들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에 설비를 운영중인 기업의 경영자에게 물었다.
뜻밖에도 "별로 타격이 없다"고 했다. 가장 저급하고 대체가능한 설비만 개성공단에 남겨뒀기 때문이란다. 북한이 공단을 잠정폐쇄하고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신규투자를 금지하는 조치들이 반복되는걸 보면서 갑작스런 폐쇄가 닥칠수도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상황변화에서도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않겠다고 한 남과 북 정부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지 않은 기업인은 이렇게 타격을 벗어났지만, 개성공단 폐쇄는 없다는 전제아래 투자를 계속했던 어느 기업인은 상황을 수습할 길이 없자 연락을 끊고 잠적해야 했다. 거래선이나 고객들, 근로자들에게 파산 선고를 한 셈이다.

신뢰의 대가가 패가망신이어서는 안될 일이다.
공무원들 대책회의하면 늘 내놓는 모범답안처럼, 세금 미뤄주고 대출해주는건 '대책'이 아니다. 소득이 사라진 마당에 세금이 무슨 의미가 있고, 대출 받은 돈은 언제 어떻게 갚으란 말인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개성공단 기업인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박대통령이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뢰 자본' 회복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비용 지출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에 국민들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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