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 민족 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러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1919년 2월8일 도쿄 치요다구 간다에 위치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이날 재일 유학생들은 조선 유학생 학우회 임원선거를 위한 총회가 열린다는 통지에 속속 모여들었다.
1층 강당을 메운 600여명의 유학생은 무엇인가 일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고무돼 있었다. 두 달 전인 1918년 12월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지)가 '재미 한국인들이 미국 정부에 독립 지원을 바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었고 12월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도 유학생들을 북돋았다.
오후 2시에 맞춰 사회자가 개회선언을 하자마자 한 청년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독립선언서를 읽어나갔다. 다음은 2·8 독립선언서에 포함된 결의문.
1. 본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전제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강당에 박수가 쏟아지자 일본 경찰들이 단상으로 몰려들어왔고 난투극 끝에 학생대표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이어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1일 서울에서 이뤄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 대표단인 송계백이 2·8독립선언문을 숨겨 한국으로 오자 민족지도자들은 큰 자극을 받았다. 이들이 만든 2·8 독립선언문을 기초로 3·1 독립선언문이 작성됐고 재일 유학생 상당수는 고국으로 돌아와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