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컨설턴트·파슨스 스쿨… 다 해보니 내 길이 보였어요"

머니투데이 김은혜 기자 | 2016.02.10 12:54

[내일은 내가 만든다, 진로개척자]⑤ 이 진 왓츠앱 SW엔지니어

편집자주 |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죽어라 스펙을 쌓고, 대기업에 취업을 해야 성공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코리안 웨이'다. 하지마 이를 과감히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좇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써나가는 남다른 성공 방정식을 소개한다.

# '미국판 카톡' 왓츠앱(WhatsApp)이 2014년 2월 17조원에 페이스북에 인수됐다. 실리콘밸리 역대 최대 규모의 인터넷 서비스 인수합병 사례가 된 왓츠앱이 이름조차 생소하던 스타트업이던 2012년 7월, 공동창업자인 얀 코움(jan koum)이 두번씩 인터뷰를 청하며 함께 일하고 싶어했던 여성이 있다. 현재 왓츠앱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이진(31)씨 이야기다.

IBM 컨설턴트, 파슨스 패션스쿨 졸업, 왓츠앱 엔지니어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이씨는 어린시절을 주로 미국과 한국의 시골마을에서 보냈다. 노스다코타주 파고(Fargo)에서 태어나 초등학생 시절 잠시 강릉에서 살았던 이씨 가족은 아버지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되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99년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에 입학한 언니를 따라 이씨는 드디어 꿈꾸던 도시생활을 하게 된다. 고교시절은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학생회 활동(골프팀 캡틴, 봉사활동 회장, 한인학생회 회장)을 비롯 스무디 가게, 케더링 이벤트 서빙, 한국문화센터 보조교사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릴 적 이씨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개발자가 대우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2003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처음 접해본 컴퓨터공학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기숙사로 돌아와 울었던 날들도 숱하다.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를 해야만 겨우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몇 년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리콘밸리의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90피스짜리 전기공학 놀이세트를 받고 예닐곱살부터 로봇 팔을 직접 만들거나 프로그래밍을 한다. 그만큼 그들에게 공학과 코딩은 생활 그 자체다.

극도의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공부한 결과 좋은 학점을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IBM에서 테크 컨설턴트로 일을 시작했다. IBM에서는 주 60~80시간씩 일했지만 고교나 대학시절보다 상대적으로 몸은 편했다.

2007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졸업 당시./사진제공=이진
몸이 편해지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법.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서 '힘들게 공부해서 들어온 대기업이 도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고민이 시작됐다. 스물두살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 안착해 평생 월급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고, 2009년 무작정 한국행을 선택했다.

영어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도 다니는 등 한국에서의 2년은 즐거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잊고 지냈던 어릴 적 꿈이 떠올랐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 무작정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에 원서를 넣었다. 6개월 만에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 통지서를 받았지만 2년간의 학비와 비싼 뉴욕 물가는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후회없는 삶을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2년 과정을 10개월 만에 마쳤다.

막연한 꿈이나 못해본 일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니 진로를 결정하는 것도 더 쉬워졌다. 2012년 5월 다시 실리콘밸리로 돌아왔다.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있었지만, 언니 집에서 조카와 함께 2층 침대를 나눠 쓰면서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한달 두달 시간이 흐르면서 100군데 넘는 곳에 원서를 넣었고 '서류광탈'의 경험이 쌓이면서 조바심도 생겼다.


파슨스 스쿨 졸업작품./사진제공=이진
당시 일자리를 알아보던 링크드인(LinkedIn)에서 왓츠앱이라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평소 즐겨 쓰던 메신저였기에 채용공고를 자세히 보니 '오피스 매니저'라는 파트타이머를 찾고 있었다. 취업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 정도로 하면 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고 사장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

왓츠앱의 공동창업자인 얀 코움(jan koum)과 직접 대면했던 그 날의 인터뷰는 지금도 생생하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얀 코움은 키 190㎝의 어마어마한 체격에 인상도 험상궂었다. 차가운 말투에 주눅이 들었지만, 안 되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한국은 왓츠앱보다 카카오톡을 많이 쓴다'는 말에 그는 관심을 보였고, 한국의 테크문화 그리고 아시아의 메시징 문화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며칠 만에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왔지만 희망하던 연봉도 원하는 일도 아니었다. 한국어 고객상담 직원으로 풀 타임으로 일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어렵게 컴퓨터공학을 공부했는데 고객상담이라니…'. 마침 IBM보다 25% 정도 높은 연봉을 제시한 컨설팅 회사의 제의를 받아 출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용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던 왓츠앱 채용 매니저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사장이 찾으니 오늘 당장 회사로 나와달라는 것이었다. 얀 코움, 브라이언 액튼 두 공동창업자는 다짜고짜 왜 자신들의 오퍼를 받지 않았느냐고 묻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고객상담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며, 월급이 너무 적습니다."

실리콘밸리 아이들은 코딩이 생활 그 자체이다. 전기공학 세트로 로봇 팔을 만들고 있는 이진씨의 조카들./사진제공=이진
무심한듯 차갑던 태도가 다소 누그러진 얀 코움 사장은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일단 회사에 들어와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보라는 것, 월급도 처음 제안했던 아르바이트 급여의 2배 이상의 시급을 주겠다고 했다. 단, 정직원 전환 여부는 컨설턴트로 6개월 이상 일해 본 다음 다시 협상하자고 했다.

이진씨의 가족들./사진제공=이진
2012년 7월 16일, 드디어 왓츠앱이라는 스타트업을 통해 실리콘밸리에 진출하게 됐다. 처음엔 정해진 역할이 없어서 스스로 이런저런 일을 찾아서 했다. 어느 날 '개발자가 필요한데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는 도저히 못할 것 같았던 프로그래밍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대학을 떠나 컴퓨터 공부를 안 한 지 5~6년이 지났지만 인터넷을 찾아가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년 만에 개발자로 정식 재계약을 하게 됐다.

4년간 이씨가 겪은 실리콘밸리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기회'이다. 이씨처럼 오랫동안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았어도 열심히 하면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이씨는 말한다. "살다보면 힘든 결정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론 해서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기회는 반드시 주어집니다. 당신은 후회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베스트 클릭

  1. 1 남편·친모 눈 바늘로 찌르고 죽인 사이코패스…24년만 얼굴 공개
  2. 2 나훈아 '김정은 돼지' 발언에 악플 900개…전여옥 "틀린 말 있나요?"
  3. 3 "예비신부, 이복 동생"…'먹튀 의혹' 유재환, 성희롱 폭로까지?
  4. 4 불바다 된 LA, 한국인들은 총을 들었다…흑인의 분노, 왜 한인 향했나[뉴스속오늘]
  5. 5 계단 오를 때 '헉헉' 체력 줄었나 했더니…"돌연사 원인" 이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