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사제서품식에서 이른 나이에 '운명'을 결정한 사제가 권 신부를 포함, 20명이다. 이들은 서품식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께 봉사하겠다’는 의미로 땅바닥에 엎드리는 '부복'을 함께 했다. 그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청빈의 삶을 살고자 이들은 함께 엎드렸다.
사제 서품을 위한 성품성사는 가톨릭의 칠성사 중 하나다. 성직자로 선발된 이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해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림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축성되는 성사'를 일컫는다.
20명의 신부는 자신의 두 손을 합장하고 주교인 염수정 추기경과 후임자들에 대한 존경과 순명을 서약했다. 청년들은 봉사 직무에 적합한 성령의 은혜를 내려 주도록 하느님께 청원하는 고유의 축성 기도를 염 추기경에게 받았다.
인구 고령화 등의 문제로 20여 년 전보다 수품자의 수는 줄었지만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천주교의 스승들, 선배들을 따라 신의 사랑을 전파하려는 소명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평생 청빈의 삶을 걸으며 사랑을 전파했다. 고인은 은퇴 후 보조금을 지급 받았지만 어려운 처지의 사람에게 나눠줬고, 남겨둔 많지 않은 재산도 신학교와 후배 사제들을 위해 썼다.
이날 서품된 청년 신부 20명의 재산 목록도 단출하다. 권 신부는 "옷가지 몇 벌, 핸드폰, 친구가 준 노트북컴퓨터가 있다"라며 "이 밖에 성경, 묵주, 수단, 성작과 같은 제구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로 "기대감이 있지만 '잘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 출생으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됐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고인은 시대의 고비마다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을 실천했다. 고인이 머물던 명동성당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고인은 2009년 2월 16일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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