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까닭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6.01.23 03:10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36 - 공양왕 : 루머에 휩쓸려 나라의 문을 닫다

"(공양왕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판삼사사 안종원에게 개경을 지키게 하였다. 임금이 탄 수레가 한양에 이르니 관찰사 유구가 화려한 무대를 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맞이했다."(고려사절요)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 최초로 통일국가의 도읍이 된 것은 조선 건국 전인 1390년의 일이다. 그 주인공도 이성계가 아니라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었다. 그는 왜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을까? 여기에는 루머에 휩쓸려 소용돌이친 고려 말의 어지러운 사정이 얽혀 있다. 그것은 500년 고려왕조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공양왕의 본명은 왕요이며, 고려 신종의 7대손이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왕요를 덕망 있는 인물로 그린다. 재물을 헐벗은 백성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권력보다 예술과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를 눈여겨 본 정몽주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막기 위해 왕요를 대항마로 내세운다. 물론 이러한 캐릭터는 극적 상상이 적지 않게 가미된 것이다.

역사에서 공양왕은 우왕과 창왕을 따르던 고려유신 세력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혁명파에게 낙점되어 왕위에 오르는 인물이다. 1389년 이성계와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파 9인이 흥국사에 모여 창왕을 폐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위화도회군 직후 유배된 우왕이 최영의 생질 김저 등과 정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자 고려유신들의 구심점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임금을 끌어내리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무엇보다 백성이 납득해야 했다.

그때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폐가입진(廢假立眞)'이었다.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것. 이 논리는 황당하게도 저자에 떠돌던 루머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왕의 아버지가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이라는 소문이었다. 신돈은 공민왕 치세에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뜯어고치며 개혁에 나선 승려였다. 사실 이 루머는 그를 쫓아내려던 권문세족의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혁명파는 소문의 진위여부에 개의치 않았다.

결국 우왕과 창왕 부자는 '가짜 왕'으로 몰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문제는 '진짜 왕'으로서 새로이 즉위한 공양왕의 입지였다.


왕조국가에서 다른 성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건 이미 나라의 명줄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이라는 루머를 공식화하는 순간 고려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공양왕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혁명파의 진정한 노림수 역시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양왕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이색, 이숭인 등 온건파를 끌어들이며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1390년 윤이와 이초의 무고 사건이 터지면서 이 또한 헛수고가 돼버렸다. 두 사람은 명나라 황제에게 공양왕이 이성계의 친척이라는 둥, 중국을 침략하려 한다는 둥 근거 없는 뜬소문을 고변했다. 공양왕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애써 모은 친위세력마저 와해되고 말았다.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공양왕은 파격적인 카드를 꺼내든다. 그는 고려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려 했다. 기실 한양은 오래 전부터 도읍지로 회자돼 왔다. '도선밀기'에 왕의 기운이 깃든 땅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도참설은 또 다른 의미의 루머로 민간에 널리 유포돼 있었다. 어찌 보면 소문에 의해 왕의 기운이 다하자 또 다른 소문으로 맞불을 놓은 셈이다. 신하들은 반대했지만 공양왕은 음양의 이치를 거론하며 밀어붙였다.

그러나 즉흥적인 천도는 해프닝으로 귀결되었다. 1390년 9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호랑이의 잦은 출몰로 그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온 것. 1392년 공양왕은 왕위를 이성계에게 넘기고 유배를 떠났다. 조선 땅에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 설 자리는 없었다. 몇 년 후 공양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루머로 시작해 루머로 끝난, 실체 없는 임금의 종착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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