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지뢰밭…3년반 빚정리하니 7년뒤 금융위기"

머니투데이 이철환 단국대 교수 | 2015.12.14 10:30

이철환의 세계 금융전쟁 <2부>금융위기는 왜 발생하는가? ①

편집자주 | ‘금융전쟁의 승자가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만큼 적어도 패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경제기획원, 재정경제부, 한국거래소 등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은 이철환 단국대 교수 겸 한국무역협회 초빙연구위원(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의 조언이다. 이 교수는 팍스 아메리카나로 상징되는 미국의 절대강자 재부상과 일본의 침체를 금융대전의 승자와 패자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30여년간 경제 관료로 일했고 여전히 연구와 실물경제에 대한 분석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시각을 통해 한국의 금융대전 준비전략도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한국경제의 현실과 주변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해법의 전제가 됨은 물론이다. 머니투데이는 글맛을 살리기 위해 가급적 그의 제안 원문('세계금융전쟁')을 옮긴다.


그동안 세계경제는 수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금융위기를 겪어왔다. 그중에서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가장 대표적인 위기였다. 이중 1997년의 위기는 우리나라가 직격탄을 맞았고, 2008년의 글로벌 위기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그 진앙지가 되었다.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우선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살펴보자. 서구사회는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을 내세워 동아시아지역의 자본시장을 좀 더 과감하게 개방하도록 요구하였다. 아시아 국가들은 외국인 투자자금이 필요했기에 별수 없이 자본시장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그들은 어떤 안전장치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헤지펀드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태국이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소로스가 회장으로 있는 퀀텀펀드, 타이거펀드 등은 태국통화에 막대한 투기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태국은 1997년 6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이후 투기세력들은 잇달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우리나라를 강타했다.

이로 인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통화가치가 대폭 떨어지고, 나아가 신용경색과 신용불안을 초래하게 되었다. 금융시장 불안은 실물경제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들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고 아울러 강도 높은 금융개혁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1999년 이후에야 진정을 찾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도 직격탄을 맞게 된다. 우리 금융기관들은 동남아시아에 빌려주었던 자금을 회수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있던 외국투자자들은 우리 금융기관에게 빌려주었던 자금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해외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고 달러화가 부족해지자 국내 금융기관들은 외환시장에서 환율수준을 불문하고 달러화를 매입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원화환율이 급등하고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바닥나게 되었다.
한편, 실물부문에서는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로부터 위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삼미그룹과 진로,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부도처리 되었다. 1999년 7월에는 당시 재계 순위 3위였던 대우그룹마저 기업회생절차인 ‘워크아웃(workout)’을 신청하였다. 이러한 실물경제의 혼란과 외환위기가 맞물려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1997년 12월 3일부터 총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면서, IMF 관리체제가 시작되었다. 당시 외환은 바닥이 나고, 30대 재벌그룹 가운데 16개사가 해체됐으며 100여 개의 중소기업이 줄 도산했다.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부동산 가격은 폭락했다. 거리에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들이 넘쳐흘렀다. 이로 인해 그동안 땀 흘려 이룩해 놓은 경제성과를 일시에 날릴 뻔했다.

이후 우리는 피나는 노력 끝에 2001년 8월 23일, 1억 4천만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 잔금을 모두 상환함으로써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 8개월 만이며, 당초 예정보다 3년 가까이 앞당겨 빚을 정리한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이 IMF 관리체제를 거치는 가운데 거두게 된 성과도 없지 않았다. 우리 경제사회의 시스템을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아울러 전 국민이 실전의 경제교육을 이수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너무 비싼 레슨비를 지불했다. 한마디로 국민들의 아픔과 고통이 너무나 컸다는 것이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 아시아 금융위기의 상처가 점차 아물어갈 무렵 또다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 파장이 우리에게도 밀려왔음은 물론이다. 이후 우리 경제사회는 잠재성장률이 약화되는데다가, 그마저도 ‘고용 없는 성장’현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성장통을 심하게 겪고 있다.
2008년 들어 미국은 베어 스턴스(Bear Sterns), 리만 브러더스(Lehman Brothers), 메릴 린치(Merrill Lynch) 등 대형 투자은행 3개가 매각되거나 파산하고,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AIG도 파산 직전까지 가게 되는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1997년의 금융위기가 금융변방국들인 아시아국가에서 촉발된 데 반해, 이번 위기는 금융최강국인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시발점은 2000년의 닷컴버블(dotcom. bubble)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성장동인을 가지게 된다. 바로 정보화의 총아 IT산업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은 이의 절정기였다. 나스닥시장은 주가가 3배 정도 뛰었다. 그러나 2000년 들면서 점차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어진 금리인상은 결국 IT버블(닷컴버블)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연방준비이사회 의장이던 그린스펀은 IT버블이 종료된 뒤 곧바로 2001년 엔론의 회계부정 사건이 터지자 한때 연 6.5%에 달하던 정책금리를 10여 차례의 조정을 거쳐 2003년 6월 1%까지 낮췄다. 이후 시중유동성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주택시장으로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부동산경기는 당시 부시 행정부의 주택장려정책과 맞물려 유래 없는 호황을 맞게 된다. 그 결과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늘어났고, 이를 증권화(securitization)했던 점이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뇌관이 된 것이다. 2000년부터 5년간 미국의 주택 시가총액은 무려 50%나 급증했다.

이 기회를 틈타 미국의 모기지 업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며 수수료 수입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는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대출자 중 빚을 제대로 갚을 능력이 떨어지는, 즉 상대적으로 저 신용자인 ‘서브프라임(subprime)’에 대한 대출마저 급증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택가격은 늘어난 유동성과 적극적인 주택시장 부양책 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이것이 평소라면 은행이 대출을 꺼렸을 서브 프라임(sub-prime) 등급의 사람들에게도 대출을 시작한 배경이다.
금융회사들은 이 대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상품을 대거 만들어 유통했다. 이것이 바로 ‘주택저당증권( MBS, Mortgage Backed Securities)’이다. 문제는 이 주택이나 토지를 담보로 발행되는 채권인 주택저당증권이 주택가격이 빠지게 되면 곧바로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물론 주택가격이 한두 달 오르다 말았다면 은행도 섣불리 서브 프라임 등급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조가 수년간 지속됨에 따라 은행 또한 주택가격은 계속 오르리라 믿게 되어버렸다. 여기에 신용평가사들까지 가세했다. 신용평가사들이 월가의 금융회사들과 공모해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신용등급을 높게 유지했고, 이로 인해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대량 부실사태가 증폭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 연방준비이사회는 거품과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2004년 이후 금리를 17번에 걸쳐 4.25%p(1.0→5.25%) 올렸다. 마침내 부동산 버블이 터지고 금융위기가 시작되었다. 주택시장 경기가 꺾이고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집값이 곤두박질치자 대출을 갚지 못하고 집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8년 9월 미국정부는 주택시장 침체와 모기지 손실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양대 모기지 업체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을 국유화하고, 양사에 총 2,000억 달러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 두 회사는 미국 전체 모기지 채권 발행 규모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이어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신청을 했고 결국 파산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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