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한 유영철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생애 첫 범죄를 저질렀다. 단순 절도였다. 그는 1988년 이웃집 누나의 기타와 현금 22만원을 훔친 혐의로 붙잡혀 보호자 위탁보호 처분을 받았다.
유영철은 이후 사기와 특수절도와 강간 등 몇 차례 범죄를 거쳐 2003년, 서울 신사동 명예교수 부부를 시작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흉악범으로 변모했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인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부유층과 여성, 고령층 20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유영철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흉악범들이 '절도'로 생애 첫 범행을 시작한다. 단순 절도는 상습범죄와 강력범죄의 '씨앗'인 셈이다. 경찰은 단순 절도 등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형사처벌이 아닌 선처의 기회를 줘 교화하는 새로운 시도인 '경미범죄 심사위원회'를 내년 전국으로 확대 시행키로 했다.
경찰은 피해 정도가 경미하거나 피해를 변상한 범행 등을 심사위에 회부하는 즉결심판을 활성화해 가해자가 곧바로 전과자가 되는 경우를 최소화할 방침이다. 올 3~10월 경찰서장과 과장급 경찰관, 시민위원 등으로 구성돼 시범 운영된 심사위는 총 612명에 대한 처벌을 감경하거나 훈방 조치했다.
경찰은 한 번의 범행으로 전과자로 낙인 찍히면 반복적인 범행에 노출되고 강력범죄로 옮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심사위 활동이 이를 예방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계적인 형사처벌 과정에서 가해자가 반성보다는 반사회적인 분노를 키울 가능성이 높고, 반복되면 죄책감마저 무뎌질 수 있는 탓이다. 특히 10대 청소년과 20대 젊은층의 절도 범행이 이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1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 1~10월 발생한 강·절도 송치사건의 피의자 9만3562명 중 10대가 2만5826명(27.6%), 20~30대가 1만7338명(18.5%)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경찰 관계자는 "살인범 유영철이나 서진환도 최초 범행은 청소년기 저지른 절도였다"며 "절도가 범죄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처벌'만이 능사 아냐…"잘못에 대한 인식과 반성 중요"
경찰은 심사위에 시민이 직접 참여토록 해 최대한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가벼운 범죄를 처분 감경한다는 방침이다. 심사위 시범운영 성과에 대해 일선 현장에선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서울의 일선 경찰서 관계자는 "어려운 가정환경이나 형편 때문에 절도를 저지른 경우 바로 형사입건하지 않고 기회를 주면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 범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례가 많다"며 "처벌 일변도보다는 교화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관도 "경미한 범죄로 전과가 남게 되면 사회생활이나 취업,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또 다시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될 수 있는데 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반면 경미한 범죄라도 법 집행의 공정성 차원에서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보다 명확한 심사위 회부 및 선처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방 일선서의 한 경찰관은 "경미하더라도 범죄는 범죄"라며 "경찰관이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해 현장에 출동해 공들여 수사했는데 심사위에서 경감 처분돼 버리면 허탈한 기분도 든다"고 말했다.
프로파일러(범죄행동분석요원) 권일용 경감은 "단순 절도나 생계형 절도를 처음 저질렀을 때 재범 가능성 등은 아무도 속단할 수 없다"며 "다만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고 잘못을 인식하고 반성할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