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버지의 딸'로 살아가는 30대 여성들에게

머니투데이 이재은 여자라이프스쿨 대표 | 2015.11.06 06:30

[여자사람취준생일기]

틱낫한 스님의 책 '평화로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서커스단에서 공중 그네타기를 하며 사는 아버지와 딸이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딸에게 “우리가 잘 살려면 서로를 돌봐주어야 한다. 내 목숨이 네 손에 달렸잖니. 제발 나를 돌보아 다오.” 그러자 딸이 말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 스스로 돌보세요. 아버지가 안정된 마음으로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저도 줄 위에서 각별히 주의해서 실수하지 않으면 돼요.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돌보세요. 저는 저를 돌볼게요.”

커리어 카운슬링을 하다보면 의외로 ‘아버지의 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누구나 아버지의 딸이겠지만 분석심리학자들은 아버지에게 각별한 영향을 받은 딸을 특별히 ‘아버지의 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우경 심리학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이런 딸들은 형제자매 중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딸이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상관없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딸”이라며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자신감을 가진 ‘아버지의 딸’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닮으려 하거나 무능하고 약한 아버지를 보완하려고 애쓰거나 혹은 아버지 존재를 부인하며 살아온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아버지의 딸'들은 대체로 학업성취가 우수하고 가족 내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남성과 동등한 꿈을 펼칠 수 있다고 독려 받았던 경험을 지녔으며 아버지의 가치, 즉 남성적 가치라고 불리는 경쟁에서 승리, 객관적 성공, 분석적 사고와 평가를 중시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와 야망을 충족시키는데 자신의 인생을, 커리어를 바친다.

여성의 커리어설계에 있어 ‘아버지의 딸’을 거론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딸로 성장해온 딸들의 커리어 패턴에 일정한 특징과 양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특성은 여성을 온전한 자기로 살게 하는 대신 타인의 칭찬과 인정에 목마른 삶을 살게 만드는 어두운 그림자 역할을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빠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저를 훨씬 예뻐하셨어요. 왜냐하면 제가 훨씬 공부를 잘 했거든요. 아버지는 회사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제가 받아온 성적표를 보면 힘이 난다고 하셨죠. 저는 그런 아버지를 보는 게 좋았어요.”

서울 소재 대학 기계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재직중인 A씨는 변리사 시험을 준비중이다. 몇 년째 고배를 마시고 있지만, 절대 변리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왜 변리사가 되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그냥 하고 싶다’고만 대답한다. 사실 A씨는 미국 유학도 준비했었다. 지금 상태로는 뭔가 불충분하고 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여러 경력전환을 시도하는 핵심적 이유다.

“아버지는 아직도 술을 드시면 ‘네가 더 크게 될 줄 알았는데’라는 말씀을 하세요. 더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하시는 거죠. 그럴 때면 이렇게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게 뭔가 죄책감도 느껴지고 불편해져요. 솔직히 제가 아주 잘 나가는 건 아니잖아요.”

많은 ‘아버지의 딸’들은 자신이 정말 이루고픈 꿈의 종착지는 없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 하고 멋있는 것, 아버지가 인정할 수 있는 성공한 경력이 그들의 꿈인 셈이다. 한 번도 내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주관적 경력 성공을 설계하고 꿈꿀 힘이 없다. 그들의 커리어엔 아버지의 야망이 있고, 어머니의 희생이 있고 가족의 기대가 담겨져 있다. 마음속에 하고픈 일이 있어도,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내를 솔직하게 밝히고 행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분리돼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격려 받는 아들과 달리 딸은 어머니의 또 다른 나로, 아버지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로 밀착된 관계를 맺는 것을 간접적으로 강요받기 때문에 좀처럼 부모의 삶에서 분리돼 나만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 ‘착한 딸’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배신이고 일탈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아버지의 딸’로 살아온 여성들이 서른 중반 커다란 정체성 혼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어딘가 있을 파랑새를 찾듯이 자신에게 어울릴 직업과 커리어를 좇아 살아왔으나 늘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불안을 반복해서 경험해야 했고, 결국 ‘과연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요?”

겉으론 화려한 커리어우먼이지만 이제 막 대학을 입학한 스물 남짓한 새내기 여대생처럼 진로고민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영화 ‘마담 프로스트의 비밀정원’에서 나온 대사가 떠오르곤 한다.

“네 인생을 살아라”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딸, 어머니의 딸이지만 평생을 그들의 딸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나의 커리어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담아 이고 살 책임감도 없다. 공중그네타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딸처럼,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을 딸은 자신의 삶을 각자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물론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지지,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도 변함없이 ‘괜찮은 나’ 일 수 있다는 용기를 갖는 것이 내가 찾던 진짜 파랑새과 만나는 첫 걸음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이제라도 마음에서 울리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재은 대표는… 현재 여성 커리어 카운슬러로 활동하며 강의, 상담,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과거 페미니즘 매체에서 취재기자로 활동했고 현재 여성 커리어교육업체인 여자라이프스쿨을 아담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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