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주영, 기능공·근로자들과 함께 한 생애

머니투데이 양영권 기자 | 2015.11.03 09:02

[아산 탄생 100주년…기업가정신을 생각하다] <2>특권의식·갑질 없는 '노동자'의 삶

고 아산 정주영 회장의 울산대 창학 정신이 새겨진 바위. /사진=양영권 기자
『젊은 시절 어느 학교 공사장에서 돌을 지고 나르면서 바라본 대학생들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에게는 한없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 이루지 못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여기에 배움의 주춧돌을 놓게 하였으니
젊은이들이여 이 배움의 터전에서 열심히 학문을 익혀 드높은 이상으로 꾸준히 정진하기 바랍니다.』

울산 남구에 있는 울산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큰 바위에 세로로 이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울산대학교 설립자 고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학교를 세우며 했다는 말이다. 울산대는 이 말을 '창학 정신'으로 받들고 있다.

◇평생 '노동자'라는 생각 = 아산의 시작은 노동자였다. 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전부다. '창학 정신'에 언급된 학교 공사장은 현재도 남아 있는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본관이다.

아산은 지금은 북녘땅인 강원 통천군 아산마을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농사를 지었다. 10대 후반에는 여러 차례 가출을 했으며, 네번째 집을 나왔을 때 인천 부두와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뼈가 으스러지게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어 상경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본관 신축 공사장에서 돌을 지고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막노동을 했다. 아산은 나중에도 고려대 얘기가 나오면 본관 건물을 자기가 지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정주영. /사진=아산정주영닷컴
노동은 그의 사업의 밑천이었다. 광복 직후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 공장을 하다가 토건업자들이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을 알고 '현대토건'을 세웠다. 친구와 형제 등 동업자들이 토건 사업은 경험과 자본이 많아야 한다며 말렸지만 그는 "막노동 시절 건설판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며 강행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개발사업이 본격화되자 현대토건의 규모를 확대할 필요성을 느껴 1950년 1월에는 '현대건설'을 출범시켰다. 현대건설은 이후 고령교 공사 등으로 시련을 겪긴 했지만 '20세기 최대 역사'로 평가되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등을 통해 우리 건설 역사에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한다.

직원들과 함께 차를 미는 정주영. /사진=아산정주영닷컴
1976년 7월 입찰에 성공한 주베일 공사는 4600억원 규모였다. 당시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50%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난 액수다. 해외에 진출한 것은 석유파동 등으로 돌파구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정경유착으로 성공했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였다.

굴지의 기업을 일군 뒤에도 그의 삶은 소박한 노동자의 삶 그 자체였다. 아산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나 자신이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나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일생은 기능공, 근로자들과 함께 한 세월이다"라고 고백했다.


◇특권 의식 없었던 삶 = '부자가 아닌, 부유한 노동자'라는 생각은 그의 삶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울산 현대중공업에 마련된 아산 기념관 전시실에는 그가 30년 동안 신은 구두가 전시돼 있다. 굽이 닳는 게 아까워 징을 박아 넣을 정도였다. 회사에는 매일 아침 6시30분이면 걸어서 출근을 했다. 평생 담배와 커피도 하지 않았다. "배도 부르지 않는 것을 왜 하느냐"라는 생각이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정주영(맨 오른쪽). /사진=아산정주영닷컴
현장에서는 근로자들과 함께했다. 회사 수련회에서 웃통을 벗은 채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하는 아산의 사진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20대 젊은 직원들과 어울려 팔씨름을 했다. 학자들은 아산이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야단은 많이 쳤지만 실수를 했다고 내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주종관계'가 아닌 '동료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

1977년부터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역임했지만 그는 '재벌'이라는 말을 끔찍히 싫어했다. "전체 기업인을 통틀어 아예 영리만을 추구하는 경제동물로 보는 시각이 못나 안타깝다"고도 했다.

아산기념관에서 정주영과 관련한 자료들을 보고 있는 외국인들. /사진=양영권 기자
외국인의 눈에도 아산의 모습은 놀라울 따름이다. 한호재단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기업에서 인턴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호주의 젊은이 루신다 캠베이(21)는 아산기념관 전시실을 둘러본 뒤 기자에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큰 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고, 평생 검소하게 노동자처럼 살았다는 것에는 존경심이 든다"고 말했다.

아산의 정신은 그대로 현대가에 계승됐다. 낮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생산 라인을 둘러보며 근로자들을 격려하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장경영'이 대표적이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맷값 폭행', '땅콩회항' 등 국내 대기업 총수 일가의 그릇된 행태가 범현대가에서만큼은 없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정주영이 신던 구두. /사진=양영권 기자
박종희 아산리더십연구원 부원장은 "아산이 특권의식 없이 노동자라는 생각을 가진 것은 경영자로서 사회적 책임과 사명감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오로지 자기가 부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요즘 경영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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