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은 모두 '파탄주의'…우리는 '시기상조'인 이유

머니투데이 김만배 기자, 이태성 기자, 양성희 기자, 황재하 기자, 한정수 기자 | 2015.09.19 07:00

[서초동살롱<82>]법조계 "결국 파탄주의 도입될 것"…사회적 합의 통해 보완책 마련해야


'결혼 생활이 아무리 파탄에 이르렀다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나빠지는 과정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상대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다.'

'잘못이 있는지 여부를 떠나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상대 배우자와의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

이른바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혼을 청구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상반된 입장인데, 대법원은 얼마 전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의 기로에서 또다시 유책주의를 선택했습니다. 배우자가 아닌 여성과 15년 동안 동거한 남성이 청구한 이혼 소송에서 원고 패소 취지로 판결한 것입니다.

대법원이 유책주의를 선택한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50년 전에도 "잘못이 큰 배우자의 이혼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결했고, 이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이번 판결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시기상조' 입니다. 바꿔 말하면 언젠가는 유책주의가 아닌 파탄주의가 인정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파탄주의가 인정될 것' 예상 나오는 이유

간통죄 처벌 조항이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다가 결국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따라 폐지됐듯 대다수 법조계 전문가들은 유책주의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번 판결을 내리며 대법원이 밝힌 이유를 보면 앞으로 파탄주의가 인정될 것이라는 예상에 힘이 실립니다.

"우리 사회가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이 실현됐다고 보기에 아직 미흡하다. 이혼에 대한 국민 인식이 달라졌지만, 아직 부정적 시각이 여전한 만큼 혼인 파탄에 책임이 없는 배우자가 이혼으로 더욱 고통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판단 이유가 된 만큼 앞으로 사회가 발전하면 이번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유책주의가 가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도 앞으로 파탄주의가 인정될 것이라는 예측에 힘을 더합니다.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혼인생활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 이혼을 인정함으로써 법률관계를 정리해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느 한쪽에 잘못이 있는지 여부는 배상책임이나 재산분할 과정에서 반영할 문제이지 이혼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대법원도 대법관 사이 의견이 엇갈릴 때 회부하는 전원합의체에서 이번 사건을 심리했고, 의견도 찬성 7대 반대 6으로 엇갈렸습니다. 다음 또는 다다음 사건에서 같은 쟁점을 다루면 결과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예상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유책주의 채택하는 나라, 사실상 대한민국이 유일

잠시 해외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법치가 발달한 다른 나라들에서는 과연 유책주의와 파탄주의 중 어떤 것을 따르고 있을까요? 사실상 거의 모든 나라가 파탄주의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는 입법을 통해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전환했습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유책주의 입장이었지만 결국 2010년을 끝으로 모든 주에 파탄주의가 도입됐습니다. 우리 민법의 모델이 된 일본 법도 파탄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일본 최고법원이 1987년 판례를 통해 파탄주의를 인정한 것입니다.

파탄주의를 선택한 선진국들은 우리나라와 어떻게 다를까요? 바로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할 경우 제한적으로만 이를 받아들이고 상대 배우자와 자녀를 보호하도록 제도가 마련돼 있다는 점입니다.

영국과 독일은 상대방 배우자나 자녀에게 심각한 고통을 준다고 판단될 경우 이혼을 제한하는 '가혹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도 이혼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이혼으로 고통받지 않는다는 판단이 있을 때만 이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주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가혹조항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법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몇몇 국가는 이혼한 뒤 생계가 곤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양료를 지급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혼 후 상대방 배우자를 부양할 '책임 제도'를 인정하고 있고, 이는 미국 대부분의 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논의 충분히 거쳐야

파탄주의가 언젠가 인정될 것이라는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확정적인 미래는 아닐지라도 우리 사회와 법률은 파탄주의가 도입되는 상황에 대비해 혼란을 방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는 충분한 대비가 이뤄져야만 양성평등이 실현되는 데 발맞춰 파탄주의를 도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에 대한 논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건전한 논의입니다. 일각에서는 '파탄주의는 바람 피운 남성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입니다. 이는 파탄주의가 아무런 보완책 없이 극단적으로 잘못 도입됐을 때 벌어지는 상황인데도 왜곡된 이해가 대중에 널리 퍼져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앞서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변화를 겪은 수많은 다른 나라들의 선례를 보고 배울 기회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 사회에 가장 알맞고 성공적인 모델을 찾고, 여러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법을 논의해 최선의 결론을 내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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