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사무국장은 이 영화제가 체코 쥘른 청소년영화제, 이탈리아 지포니 청소년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청소년영화제로 꼽힌다고 했다. 또 지난해 국내 영화제에 대한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단다. 근데 이 영화제는 짧은 칼럼에는 요약하기 어려울 만치 복잡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관계자들은 자기 살던 집 전세 보증금과 사재를 털어 개최 비용을 마련했다.
돈이 없을 땐, 사람들이 스스로 입소문 내줄 만한 얘깃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제 세계 3대 청소년영화제다 이런 뻔한 것 말고, 집행위원장이 전세집 빼 진행비 마련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것 말고, 모모제인 누구의 마음도 열 만큼 아름다운 어떤 것.
도와줄테니 내 담당인 ‘미담’거리나 공익에 기여한 얘길 달라고 영화제 사무국장을 닦달했다. 3주간 수많은 이메일과 카톡이 오밤중에도 오고 갔다. 어느 밤, 이메일을 여는 순간 손맛이 왔다. ‘미담’계의 월척이었다.
피부색이 다른 이주청소년이 있다. 다른 외모 때문에 학교에서든, 동네에서든 주목 받고 의심 받는다. 차별로 상처 받은 그에게 동네 청년들이 다가온다. 예술하는 형, 누나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영화와 연극을 접한 후 소년은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전달할 수도 있구나’ 깨닫는다. 영화인의 꿈을 품은 그에게 기회가 온다. 청소년영화제가 크라우드펀딩으로 돈을 모아 소년이 영화를 만들게 해준 것이다. 지난해 일이었다.
이 소년 감독의 이야기엔 드라마가 있었다. 고난, 나눔, 해피엔딩의 예감. 이걸 알리는 건 서로에게 이로워 보였다. 영화제 실무진은 만약 소년이 관객과 심사위원의 좋은 평가를 받아 수상하면 수시합격의 길이 열리면서 ‘이주청소년’ 대신 ‘대학생’의 타이틀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런데 소년의 이야길 기사로 쓰면 방송사 등 다른 언론사의 취재요청과 네티즌 댓글에 시달릴 것이 뻔했다. 사는 동네와 가족도 노출될 것이다. 그래도 영화제 홍보에는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인들은 그를 보호했다. ‘동네에 워낙 사건사고가 많아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길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이어서 ‘가명과 모자이크 사진은 써도 된다’는 메시지가 왔다. 익명으로 써도 읽힐 만한 미담은 아닌 터. ‘월척’은 놓기로 했다.
청소년영화제 홈페이지(www.siyff.com)에 들어가 다른 영화들을 훑어봤다. 아빠가 잠 든 틈에 엄마를 만나러 간다며 홀로 길을 나선 일곱 살 여자아이가 마포대교 ‘생명의전화기’를 들고 얼굴 모르는 상담원에게 엄마의 죽음을 말한다는 이야기, 남자아이이지만 여자아이의 몸으로 잘못 태어나 갇혀 있다고 믿는 에밀리에 이야기, 60시간의 자원봉사 점수를 따기 위해 절에 다는데도 교회로 청소 봉사하러 가는 학생 이야기 등등. 아이들의 진심과 열정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낚시질 기사로 영화제를 홍보해주는 대신 그냥 영화표를 팔아주기로 했다. 몇몇 지인들이 페이스북에서 단체관람 릴레이를 하자는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3주 공들였던 월척은 놓쳤지만 오랜만에 지인들이 모여 시원한 영화관에서 청소년 감독들의 신선한 작품을 보는 시간을 얻게 됐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