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 10일 투자위원회를 열기 전 이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을 두고 막판까지 치열한 격론을 벌였다. 투자위원회가 평소와 달리 3시간 이상 마라톤 회의로 진행된 것은 이번 결정이 시장에 미칠 파장과 결과공개 여부,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결권위) 위임여부 등에서 회의 내내 격론이 오갔기 때문이다.
투자위원회가 합병찬성으로 기운 까닭은 무엇보다 해외 투기자본의 공세에서 안전장치가 미흡한 국내 기업의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컸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삼성이 뚫릴 경우 국내 기업들이 대거 글로벌 투기자본의 공격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운용수익을 따지기 전에 이른바 국부기금에 주어진 '역할론'이 우선적으로 고려됐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가 지난달 말 기준 160곳을 넘어선 만큼 사회적 기능에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상장기업을 겨냥한 헤지펀드의 무차별 공세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국민연금의 결심을 다지게 했다. "삼성물산 외 다른 삼성계열사 뿐 아니라 현대차 그룹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이원일 제브라투자자문 대표의 지적이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해외 헤지펀드가 국내 기업을 흔들 때 국민연금이 동조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이번 결정으로 해외 투기자본의 공세에 방패 역을 하겠다는 국민연금의 원칙이 재확인된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역할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틈새가 노출되는 기업들에 큰 힘이 될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기업은 성장에 따른 과실을 경영권 방어에 낭비하기보다는 미래의 성장을 위해 투자해왔다"며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주주 지분이 낮은 곳이 많아 헤지펀드의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연금이 소방수로 나서준다면 지배구조 개편 작업 등이 한결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국민연금의 역할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처럼 파장이 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슈와 관련해 의결권위를 거치지 않고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의결권 자문기관의 권고와도 반대되는 결정을 내린 것은 앞으로 있을 다른 기업들의 의결권 행사에서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의결권위 위원은 지난 10일 투자위원회 개최 전부터 찬반 결정권을 위임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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