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카노사의 굴욕, 유승민의 사퇴

머니투데이 이하늘 기자 | 2015.07.08 15:47

[the300]

"고된 나날을 살아가시는 국민들께 새누리당이 희망을 드리지 못하고, 저의 거취문제를 둘러싼 혼란으로 큰 실망을 드린 것은 누구보다 저의 책임이 큽니다…거듭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들의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8일 오후 국회 정론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담담한 목소리로 사퇴 기자회견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동안 자진사퇴 압박을 거부했지만, 당 의원총회의 '사퇴권고'앞에서는 더 이상 버틸수 없었다.

이로써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후 보름 가까이 이어진 당청 갈등은 일단 매듭이 지어졌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의 갈등이 아닌 한국 특유의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행정부와, 점차 힘이 커져온 입법부 간의 파워 충돌이다.

약 1000년 전인 1077년 1월 유럽에서도 주요세력 간의 '파워 싸움'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히리 4세는 그 대결에서 밀려 결국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있는 카노사 성 앞 눈밭에서 맨발로 3일 동안 '석고대죄'했다. '카노사의 굴욕'이다.

3년 후 하인히리 4세는 굴욕을 완전히 뒤집었다. 자신에 반기를 든 세력을 처단하고, 자신의 편이었지만 파문이 두려워 한발 물러섰던 영주와 주교들의 충성을 재확인했다. 이후 칼끝을 그레고리 7세에게 돌렸고, 결국 그를 폐위시켰다.

유 원내대표는 1077년의 하인히리 4세처럼, 친박(박근혜)세력의 맹공과 향후 총선 및 사정정국 등을 염려한 비박 의원들의 후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끝내 내던지지 않았던 것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의 사퇴는 법과 원칙, 정의에 맞지 않다는 항변이다.


또한 "고통 받는 국민의 편에 서는 용감한 개혁과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며 '자기정치'에 본격 나설 것임을 다짐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직후 90도로 고개를 숙일때와 달리 유 원내대표의 이날 사퇴의 변에는 대통령에 대한 사과의 말이 빠졌다.


카노사의 굴욕이 반전으로 끝난 이유는 설득과 소통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힘'에 밀린 전술적 후퇴였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거치면서 정치지형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박 대통령의 임기가 햇수로 3년 남았다곤 하지만, 한국정치에서 3년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기간이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이끌어낸 새누리당 의원총회가 끝이 아닌 시작으로 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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