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엘리엇 사태, 또 다른 감상법

머니투데이 박정태 경제칼럼니스트 | 2015.06.19 10:30

투자의 의미를 찾아서 <83>

#자산운용업계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른두 살의 청년이 주주총회에서 안건 승인에 이의를 제기한다. 때는 1927년 1월, 상대는 당시 미국 최대의 재벌이었던 록펠러 계열의 노던 파이프라인이었다. 그는 회사 지분 5%를 확보해 록펠러 재단(23%)에 이어 2대 주주였지만 경영진은 그의 반대를 간단히 묵살하고 주총을 일사천리로 끝냈다. 하지만 쉽게 물러날 그가 아니었다. 그가 누구인가? 훗날 가치 투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벤저민 그레이엄이 아닌가?

그는 1년간 절치부심하며 주주들로부터 위임장을 모아갔다. 심지어 사장의 친구한테서까지 위임장을 받아내 다음해 열린 주총에서 2명의 이사 추천권을 얻어냈다. 그리고는 그가 진짜로 노렸던 것을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다름아닌 노던 파이프라인의 현금성 자산을 주주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가 회고록에서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라고 이름 붙인 이 일화의 핵심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숨은 자산’을 찾아내 그것을 수익으로 연결하는것이다. 노던 파이프라인은 스탠더드 오일이 반독점법에 따라 31개 기업으로 쪼개지면서 만들어진 8개 송유관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레이엄은매출액이라고 해봐야 30만 달러에 불과한 회사가 360만 달러에 달하는 우량 철도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막 운영되기 시작한 대형 유조선의 출현으로 송유관 회사들의 주가가 형편없이 거래되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조용히 주식을 사들였다. 그리고는 경영진을 찾아가 잉여현금의 분배를 요구했다. 경영진은 이 돈이 앞으로 송유관을 교체하는 데 필요한 재원이라며 난색을 표명했지만 그레이엄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위임장 전투까지 벌인 끝에 엄청난 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노던 파이프라인 주식을 60달러에 매수했는데, 2년도 채 안 돼 회사로부터 주당 70달러의 현금과 1주당 3주의 신주를 받아내는 소득을 올렸다.
#이쯤 됐으면 눈치챘을 것이다. 지금 미국계 헤지펀드인엘리엇 매니지먼트와 삼성물산 간에 벌어지고 있는 공방전도 이와 비슷한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엘리엇은 이미 ‘숨은 자산’을 찾아냈고 저평가된 주식을 사들여 7.12%의 지분을 확보했다. 해외 투기자본의 국내 기업 공격이라느니, 이로 인한 국부 유출이 우려된다느니 하는 비난 여론이 적지 않고, 엘리엇이 장기 투자가 아닌 단기 차익만 챙기고 떠나버리는 ‘먹튀 세력’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까지 있지만 이건 다분히 국내용 감정 문제일 뿐이다.

고객들의 돈을 모아 투자하는 자산운용회사들은 국적 여부를 떠나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얻고자 한다. 장기 투자냐 단기 차익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헤지펀드든 뮤추얼펀드든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는 펀드 투자자에게 더 많은 수익을 돌려줘야 한다. 철저하게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엘리엇의 공격을 막아내는 입장인 삼성물산 역시 만만치 않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하긴 했지만 곧바로 자사주(5.76%) 매각으로 우호지분을 크게 늘렸고, 제일모직과의 합병비율이 어디까지나 법에 따라 결정됐다는 사실, 그리고 이번 합병이 3세 승계 작업의 일환이 아니라 시너지 극대화를 통한기업 가치 제고에 목적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삼성물산 지분 10.15%을 보유한 2대주주 국민연금이 침묵하고 있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ISS의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엘리엇과 삼성물산의 대결은 쉽게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 이기든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공부거리가 될 것이다. 그동안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주식을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감안하면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사실은 다들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숨은 자산’과 시장의 저평가를 언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엘리엇과 삼성이확실하게 가르쳐준 것이다.
주가 차익을 노린 헤지펀드의 공격은 물론이고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 역시 실은 시장이 놓친 이 숨은 자산을 어떻게든 자기 쪽에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레이엄 식으로 말하자면 바로 가치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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