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 인문계 위기와 언론의 과민반응

머니투데이 손동영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2015.05.19 07:19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인터넷에 한 은행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예측이 등장한다. 줄줄이 달리는 댓글을 보고 설마 하던 사람들이 예금을 인출하러 나선다. 은행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 많은 사람의 예금인출을 야기하고 결국 해당 은행은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은행의 지급능력인가 지급불능 가능성에 대한 예측인가. ‘자기실현적 소망’(self-fulfilling prophecy)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결국 그러한 미래의 원인이 되고 마는 현상을 의미한다. 유류제품 가격 상승에 대한 소문에 사람들이 우유-버터 등을 미리 구매하여 결국 해당 제품들의 가격이 상승하는 경우나, 특정 주식의 가격하락에 대한 루머가 해당 주식의 폭락으로 연결되는 경우, 불량학생이라는 낙인이 청소년의 일탈행동을 유발해 결국 불량학생이 되도록 하는 ‘낙인효과’도 자기실현적 소망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인구론’(인문계의 90%가 일이 없어 논다의 준말)이 미디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처음에는 인터넷에 그런 표현이 떠돈다는 식으로 보도하더니 이젠 아예 사실처럼 보도한다. 지난 정부 때는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우려와 개탄을 쏟아내던 미디어가 이젠 인문계의 취업률을 걱정하고 나선다. 이공계가 기피되던 시절엔 인문계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좀 높았는데 최근 들어 급격히 하락했다는 말인가. 우리 기업들의 취향이 그렇게 가벼이 변하는 것인 줄 미처 몰랐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인문계의 취업률은 이공계가 찬밥(?)이던 몇 년 전에도 지금보다 대단히 높지는 않았다. 지난 수 년 간의 인문계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률 추세는 이전과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디어는 무슨 근거로 인문계의 몰락을 말하는 것일까.

한 쪽에서는 대기업 경영자가 인문학에 관한 순회강연을 여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인문학 전공자의 대기업 취업문이 좁아질 것이라고 보도하니 인문학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미디어가 앞다투어 인문계의 위기를 얘기하면 기업이 인문계 졸업생을 덜 뽑게 되고 대학이 정원조정, 학과 통폐합에 나서고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인문계는 기피 대상으로 각인되어 결국 인문학이 몰락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연상된다. 이때 몰락의 원인은 인문학 자체의 현실인가, 아니면 미디어의 섣부른 예측인가. 사람들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대부분을 사실에 ‘기반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미디어가 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은 종종 간과한다. ‘추세’(trend)에 대한 가설은 미디어를 통해 사실로 둔갑하고 결국 많은 사람이 인문학의 몰락을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학령인구의 빠른 감소로 인한 대학간 경쟁이 심해지는 현실을 우려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 불가피한 결론이 인문계열 축소인 양 몰고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매년 배출되는 상위 10개 대학의 경영학과 졸업생이 수천 명인 반면 인문계열 졸업생의 수는 그에 현저히 못 미친다. 이미 한 학년 정원이 20명도 안 되는 인문계열 학과도 많은 상황에서 인문계열 학과 축소와 통폐합이 학령인구 감소라는 상황의 유일한 타개책인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지나친 사실왜곡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비슷한 인구구조를 가진 외국의 인문학은 모두 고사되었어야 했을 테지만 그런 사례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기초학문의 강화에 집중하는 선진국의 사례만이 눈에 띈다. 추세는 변화하게 마련인데 현재 감소추세에 있다고 해서 줄이고 없애버리면 나중에 추세가 변화한 다음에는 어찌할 것인가.

불을 땐 굴뚝엔 반드시 연기가 나듯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결과를 낳는다. 미디어가 바라는 결과는 인문학과 기초학문의 몰락인가. 아니면 인문학을 부활시킬 길을 모색하는 것인가. 추세에 대한 과민반응으로 추세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보다 기초학문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마련하는 방법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베스트 클릭

  1. 1 차 빼달라는 여성 폭행한 보디빌더…탄원서 75장 내며 "한 번만 기회를"
  2. 2 "유영재, 선우은숙 친언니 성폭행 직전까지"…증거도 제출
  3. 3 "390만 가구, 평균 109만원 줍니다"…자녀장려금 신청하세요
  4. 4 "6000만원 부족해서 못 가" 한소희, 프랑스 미대 준비는 맞지만…
  5. 5 장윤정♥도경완, 3년 만 70억 차익…'나인원한남' 120억에 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