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聯 원내대표 후보 5인 집중분석

머니투데이 구경민, 박용규, 배소진, 황보람, 박상빈, 그래픽=이승현 기자 | 2015.05.06 10:20

[the300-런치리포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 후보 5인 의원사용설명서 총정리]

자타공인 '스트라이커' 최재성…원내대표 골문 돌파할까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130석은 범민주당이 역대 선거에서 얻은 두 번째로 많은 의석수입니다.구도와 심판론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석은 ‘아무리 공천을 잘해도’ 130석보다 크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7일 열릴 새정치민주연합의 차기 원내대표 선거에 도전하는 최재성 의원은 '집권'이 얼마나 절실한 지 잘 안다. 초선 여당의원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대통령의 탈당으로 여당의 지위를 잃었고, 재선·3선을 거치며 대선과 총선에서의 잇따른 참패를 눈 앞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문재인 당대표 체제 후 새정치연합은 '유능한 경제정당'을 앞세워 여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급격히 줄였다. 그러나 '성완종 정국'에 휩쓸리며 중심을 잃은 야당은 또 다시 '정권심판'을 외쳤고, 4.29 재보선에서 대패했다.

최 의원은 지난 1일 원내대표 출마선언문을 통해 다시 '경제'를 말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중간지대를 잡기 위해선 그들의 관심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는 문 대표가 대표연설에서 주창한 '신 경제'(New Economy), '소득주도 성장론'을 뒷받침할 해박한 경제지식을 갖췄다. 특히 19대 국회 내내 기재위 조세소위원으로, 또 전반기엔 예결위 야당간사를 맡으며 예산과 세법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됐다.

기재위에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향해 "초이노믹스는 실패"라며 각을 세웠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세금-복지 문제와 쟁점현안을 바라보는 시각 면에서 궁합이 나쁘지 않다. 정부여당을 향해선 '강경 투쟁', 원내에선 '전략적 협상'이라는 다른 목소리를 동시에 낼 수 있는 내공을 갖췄단 평가다.





[그는→ 학생운동가에서 '3선' 생활정치인으로]
경기도 가평군 상면 봉수리 장화상회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부대 앞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음식과 생필품을 파는가 하면 직업군인 하숙을 치기도 했다. 4살때 지금의 남양주 조안면 봉안으로 이사, 지역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유복한 집안은 아니었다. 집 근처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이 부러워 몰래 유치원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맞고 돌아와 떼를 쓰곤 했다. 철 없는 아들 탓에 어머니는 배추장사를 해서 그를 유치원에 보내줬다.

84년 대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부모님과 큰누나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투쟁은 당시 '청년의 사명'이었다. 동국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간부로서 3차례의 수배, 2차례의 투옥을 겪었다. 제적을 당하기도 3번, 10년 만에 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졸업 후 정치에 뛰어들어야겠단 생각을 굳힌 후엔 포장마차를 시작으로 김장배추 장사, 신발 노점, 건설현장 막노동, 오징어 장사, 악세사리 공장, 미장이 보조 등 근 10년간 생활현장을 피부로 경험했다. 이 같은 경험은 서민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정치적 밑거름이 됐다.

2004년 열린우리당 시절, 전대협 출신이 대거 공천을 받을 때 최 의원도 38살 어린 나이에 이름을 올렸다. 이 때 함께 국회에 입성한 동료들이 이인영·우상호·김태년·오영식·정청래 현 새정치연합 의원 등이다.

이렇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을 타고 금뱃지를 달았던 17대 초선의원, 이른바 '탄돌이'들은 18대에서 대거 낙선했다. 하지만 최 의원은 격전지인 수도권에서 712표 차이로 살아남았다. 19대서도 지역구를 굳건히 수성, 이제는 내리 3선에 성공한 중진으로 우뚝 섰다.


[키워드→13초의 승부사]
23개월, 702일. 최 의원은 대변인만 총 4번을 지냈다. 초선 때인 2007년 2월, 당시 당 의장이던 정세균 대표에 의해 열린우리당 대변인에 처음으로 발탁되고 같은 해 대통합민주신당에서 공보담당 원내부대표를 지냈다. 또 옛 민주당과 통합한 통합민주당에서 원내대변인을, 민주당 정세균 대표 체제 출범 후 당대변인에 기용됐다.

최 의원의 첫 브리핑은 "오늘 노무현 대통령께서 열린우리당을 탈당했습니다"로 시작한다. 당 이름이 수 차례 바뀌던 대격랑의 시기 최전선에 서있었던 셈이다. 여야 당대변인과 원내대변인을 모두 경험하는 독특한 이력도 갖게 됐다.

최 의원은 풍자와 유머를 적절히 구사하면서도 정부정책의 맹점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아픈 논평'이 발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의 논평을 엮어 '13초의 승부사, 최재성 브리핑'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처음 대변인으로 데뷔할 때 역대 대변인 중 가장 큰 얼굴로 국민들을 놀라게 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방송카메라 기자들이 일반 정치인과 비슷한 크기의 얼굴로 잡아주셔서 특히 감사하다." (최재성 의원 '고별브리핑' 당시 언론기사 발췌)

[키워드→ 합리적 전략기획통]
2012년 예산국회. 예결위 야당 간사를 맡은 최 의원이 2013년도 정부예산안을 살피던 중 세수결손으로 '구멍'이 생길 것이란 걸 간파했다. 틀림없이 추가경정예산(추경)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정부는 펄쩍 뛰며 부인했고, 더 끌었다간 예년처럼 '날치기' 전철을 밟을 게 뻔했다.

결국 최 의원은 정부를 집요하게 추궁해 "추경은 절대 없다"는 공언을 받아낸 뒤 통과에 동의했다. 5년만의 예산안 합의처리였다.

이듬해 4월, 최 의원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박근혜정부가 17조3000억원의 '슈퍼추경안'을 가지고 온 것. 고스란히 남아있는 속기록으로 인해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는 정부의 미흡한 추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했다. 그것도 최 의원이 작성해준 '원고'대로 말이다. 야당이 추경예산 편성 주도권을 쥔 것은 물론이다.

지금도 보좌진들은 당시 최 의원이 2000가지가 넘는 사업을 모조리 외운 뒤 배석자 없이 예산실장을 맞상대했다며 혀를 내두른다. 치열하게 연구하고 상대방의 입장과 행동을 예측, 합리적으로 협상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치밀함과 돌파력을 모두 갖춘 그만의 면모다.




[키워드 →축구]





지난달 말, 기재위 조세소위에 들어서는 최 의원이 며칠 째 다리를 절뚝거렸다. 4.29 재보선 지원 유세차에 올랐다 차량 급정거로 다쳤다고 했다. 원내대표 출마 마음을 굳히고 의원들과의 개별접촉도 많았을 즈음이다.

'걸을 일이 많을 텐데 다리가 다쳐서 걱정이겠다'고 넌지시 건넨 말에 대뜸 "걷는 게 문제가 아니야. 한일 국회의원 친선 축구대회가 9년 만에 부활했는데 스트라이커가 이렇게 돼 큰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평소 "국가대표로 선발될 때까지 뛰겠다"고 말하고 다닐만큼 최 의원은 지독한 '축구광'이다. 매일 아침 한 번, 주말엔 3경기씩 이틀 등 많이 하는 주는 1주일에 10번도 공을 찬다. 주변에서 '최재성을 만나고 싶거든 새벽 6시 국회 운동장에 가라'고 조언해 줄 정도. 스스로도 "300명 국회의원 중 축구실력은 독보적"이라고 자부한다.





[잠깐! 이사람의 러브스토리→ 너는 내 운명]
최 의원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 한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옆 동네 소녀에게 한 눈에 반했다.

"운명은 예고도 없고 갑자기 그리고 비논리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다. 약간 갈색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 제법 큰 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량없는 신비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차 내 색시감이라는 믿음이 자연히 자리잡았다." (최재성 의원 공식홈페이지 발췌)

아내와 처음 만날 날의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내에게 잘보일 요량으로 스케이트날로 얼음에 구멍을 내던 남학생에게 핀잔을 줬다가 그 일행으로부터 뭇매를 맞은 것. 그가 자신보다 한 학년 위 형인지 몰랐던 탓이다.

그렇게 첫사랑에 빠진 그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내에게 '결혼하자'는 편지를 보냈고, 그 후 지금까지 길고 긴 '애처가'의 길을 걷게 된다. 참고로 최 의원의 말을 빌리면 "아주 중요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만신창이가 됐던 그날 스케이트장 사건을 아내는 지금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잠깐! 이런 면도? → 요즘 대세 '요리하는 남자']



최 의원의 또다른 취미는 '요리개발'. 때로는 입맛이 떨어진 아내를 위해, 때로는 냉장고 자투리 채소 소진을 위해 앞치마를 두른다.


[대표법안]
*전두환추징법(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 2013년 전두환 전 대통령 등 불법재산환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전두환추징법'을 대표발의했다. 불법자금 여부에 대한 입증을 재산을 가진 자에게 묻도록 하는 방식으로 위헌소지를 절묘하게 넘어섰고, 발의 한 달 만에 본회의까지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이후 16년간 검찰이 제대로 손대지 못했던 전 전 대통령의 재산환수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재벌증세'법 : 대기업 비과세·감면과다로 실효세율이 크게 떨어지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최저한세율을 17%에서 18%로 올리는 조세특례제한법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이밖에 기업이 적정 유보소득 초과시 최대 25%의 법인세를 적용하는 법인세법, 과세표준 3억원 이상에 대해 최고세율 42%를 신설하는 소득세법 등 재벌·대기업을 겨냥한 법안을 다수 발의했다. 최근 '연말정산 사태'를 계기로 고소득자에 대한 공제한도를 대폭 축소하는 방안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도 내놨다.

[그의 사람들]
*윤호중 새정치연합 의원 : 남양주 시 바로 옆 구리시 지역구 의원이자 기재위 동료 의원으로, 지역현안과 상임위 활동 등을 가장 긴밀하게 상의하는 대상이다. 최 의원은 "한마디로 '배짱이 맞는' 의원"이라고 그를 평가한다.

*김학용 새누리당 의원 : 19대 전반기 국회에서 예결위 여야 간사를 맡아 호흡을 맞췄다. 축구사랑도 공통점으로, 국회의원축구연맹에서도 여야 부회장으로 각각 활동 중이다. 서로가 '당은 다르지만 뜻이 잘 맞는 동료'로 꼽는다.

*가수 임재범: 서울고 1년 후배. 그를 두고 최 의원은 "우리집에서 라면깨나 없애던 녀석"이라고 회상한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도 임재범의 '사랑'을 꼽는다.






젊은 시절 쌓은 풍부한 현장경험은 지금도 정부정책의 맹점을 보게하는 최 의원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요주의!]
벌써 3선의 중진이지만 '선수'(選數)만큼이나 나이에 대한 우대도 확실한 국회에서 만49세 최 의원은 '너무' 어린 축에 속한다. 19대에서 상임위원장을 내심 노렸지만 연배가 높은 의원들이 워낙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로 뒷방 어르신으로 물러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정세균계 범친노로 분류되지만 계파색이 극히 옅은 것은 강점이자 약점. 수도권 3선이라는 중량감에 비해서 당내 입지나 대중적 인지도가 두드러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대 불출마 선언이 '아킬레스건'. 하지만 지역구를 워낙 공들여 닦아둔 덕에 '최재성 아니면 남양주는 여당에 넘어간다'는 게 당안팎의 평가. 이번 원내대표 선거 결과가 그래서
중요하다.

[프로필]
△1965년(49) 경기 가평 출생 △서초중학교 △서울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공공정책학 석사 △동국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수료 △동국대 총학생회장 △남양주시 정책기획단 상임부단장 △17대~19대 국회의원(경기 남양주시갑) △열린우리당 대변인 △대통합민주신당 원내대변인 △민주당 대변인 △19대 전반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 △19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의원




20년 숙원 해결한 '호남철' 김동철..."정치는 더 큰 경제"




정치인(Politician)은 다음 선거를 걱정하고 정치가(Statesman)는 다음 세대를 걱정한다. 나는 정치가가 되고 싶다."



19대 후반기 산업통상자원위원장에 선출된 김동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이루고 싶은 꿈이자 목표다. 위원장을 넘어 내년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훌륭한 정치가 이전에 좋은 정당을 만들어 정부를 견제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을 바로 세우고 싶은 것이 김 위원장의 바람이다. 총선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 하는 것이 목적이 되기 보다 '좋은 정치'를 해 민생과 국익에 도움이 되고자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산업은행에 들어갔다.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당시 은행은 소위 관치금융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관료주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개혁적이고 일을 잘하는 사람이 대우를 받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는 해를 거듭할수록 회의를 느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지면서 3년 내내 고민을 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민당을 정책정당으로 바꾸기 위해 전문위원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문요원 채용에 응시를 했다.

하지만 당이 돈이 없어 전문위원 채용계획 자체가 취소가 되고 대신 권노갑 의원의 보좌관 채용에 응시하게 되면서 정치 인생이 시작됐다.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국회로 입성한 이후 내리 3선에 성공했다.


[프로필]
△1955년 광주 광산 출생 △광주 북성중·제일고 △서울대 법대 △청와대 정무수석실 국장 △국회 미국산쇠고기수입협상국정조사특별위원회 간사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 총괄간사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 △손학규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국회 한반도평화포럼 대표의원 △17·18·19대 국회의원 △현재 산업통상자원위원장



[그의 대표 법안은]


의원생활중 발의한 법안이 500개가 넘는다. 19대 국회 들어서만 총 53건의 법률안을 대표발의 했고 이중 8건이 통과됐다. 덕분에 지난해 '국회 입법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회의원 당선이후 10년간의 집요한 노력 끝에 지난해 3월 5일 우여곡절 끝에 통과시킨 '군공항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의미있는 법안으로 평가된다.


이 법은 지난 50년간 전투기 굉음 노이로제에 시달려온 광주 군공항 주변지역 주민들의 숙원인 광주군공항 이전의 근거가 될 법안이다. 이 법 통과를 위해 4번 바뀐 국방부장관 모두와 간담회를 개최했고 국회의원 모임은 물론 여야 원내대표를 설득해 국회 특위까지 설치하기도 했다.

전관예우를 근절하기 위해 내놓은 '변호사 수임료 상한제한', '성공보수 금지', '판검사 퇴직후 형사 사건 수임을 제한토록한 '변호사법' 개정안도 그의 대표법안이다.

일명 '전두환 추징법'이라고 불리는 '특정고위공직자에 대한 추징 특례법안'도 대표 법안으로 꼽힌다. 2012년 6월 전직 대통령과 같은 최고위공직자에 대해 불법수익으로 형성된 재산의 80%를 불법재산으로 간주해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이 법안은 작년 7월에 통과됐다.

[키워드→호남철]
김 위원장은 '호남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매주 3시간 가까이를 소모하면서 서울에서 광주를 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그는 호남고속철도 건설을 앞당겨 이뤄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는다.

2004년부터 205명 의원의 서명을 받아 호남 고속철의 조기 착공과 완공을 요구하는 내용의 '호남고속철도조기착공촉구 대정부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마침내 호남고속철 사업은 여야를 뛰어넘은 국회의원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2006년 8월 기본계획이 확정 발표됐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서거 공약으로 처음 제시된 이후 20년간 끌어오던 논의가 마침표를 찍었다. 내년이면 서울-광주가 KTX로 1시간30분 거리로 좁혀지게 된다.

[연관 검색어→ 정치는 더 큰 경제]
"정치선진국 중에 경제후진국인 나라 없고, 경제후진국이 정치선진국인 나라도 없다."
2011년. 김 위원장은 이같은 내용을 근거로한 '정치는 더 큰 경제'라는 책을 펴냈다.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써내려간 이 책은 더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한 진솔한 고백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그는 책을 통해 "정치는 더 큰 경제이고 개별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는 경제"라며 "일시적인 국면보다 지속가능성을 염려하는 경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좋은 의미의 경제는 소득의 양적 크기를 중요시하지만 넓은 의미의 경제, 곧 정치는 그 소득을 이끌어내는 기반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까지 점검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사람들]
*이진복-새누리당 이진복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간사는 김 위원장과 개인적으로 18대 국회에서 정무위 활동을 하면서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신뢰가 쌓여 있다. 김 위원장은 이 의원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정활동을 열심히하면서 아이디어가 좋은 의원으로 평가한다.

*손학규-김 위원장은 손학규 전 대표와 가까운 사이로, 비노(비노무현)·비주류 그룹으로 분류된다.

*권노갑-김 위원장은 권노갑 전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다. 권 전 의원 밑에서 정치의 꿈을 꾸게됐고 그에겐 아직도 권 전 의원은 스승과도 같은 존재다.

[이 사람의 한마디]
"MB, 차디찬 감옥에서 눈물의 참회록 써야"
지난해 2월. 김 위원장은 대정부 질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퇴임후 구속될 것이라고 주장, 새누리당이 발끈하는 등 소동이 일었다.

김 위원장은 이 대통령이 한 매체와의 고별 인터뷰에서 집권 5년을 자화자찬한 점을 지적한 뒤 "철저히 실패한 이명박 정권이 천만번이라도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이명박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며 융단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지르고 강력 반발했으나 김 위원장은 개의치 않고 "뻔뻔하게 측근이랑 사돈을 사면해요? 그리고 자신이 무궁화장을 받아요? 시중에는 이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자금 비리를 알고 있고, 그래서 퇴임 후 이들의 입막음을 위해 그토록 무리하게 사면을 단행했다는 소문도 있다"고 음모론으로 맞받았다.

[요! 주의]
당내 비주류인 '쇄신모임'소속이었던 김 위원장은 '버럭 동철'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원칙과 소신을 중요시하는 강직한 성격이다. 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할말하지 않는 사람은 의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는 탓에 그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호불호가 엇갈린다.



'원조 저격수' 설훈, '타협'으로 무장하다




'동교동계의 막내' '영원한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으로 선출된 설훈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경기 부천 원미을)을 일컫는 말이다. DJ가 그의 정치 역정에서 빼놓을 없는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투쟁'이었다.

1975년 유신반대 시위로 고려대 사학과에서 제적당한 그는 2000년이 돼서야 졸업장을 받았다.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른 기간만도 5년이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재선 의원이던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논란에 반대해 삭발과 단식농성을 했고,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저격수의 원조'라는 그의 또다른 별칭도 투사적 기질과 맞닿아 있다.

이랬던 그가 요즘 강조하는 것은 '타협'이다. "전 기본적으로 타협입니다. 정치는 싸우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게 목적이에요. 타협을 통해 힘 없고, 세상을 견디지 못하는 약자와 함께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본령(本領)이지요."
교문위원장직도 일종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2년 임기의 위원장직을 놓고 경쟁한 같은 당 박주선 의원과 1년씩 임기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아 온 '설훈의 정치'가 타협 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장착한 셈이다.

[프로필]
△1953년 경남 창원 출생 △마산중·고등학교 △고려대 사학과 △민주화청년연합(민청련) 창립 주도 △김대중 총재 비서 및 보좌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공동의장 △민주화평화연대 조직위원장 △아태재단 이사 △15·16·19대 국회의원 △현재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





[키워드→김대중]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법정에서 처음 맺은 DJ와의 인연은 김 전 대통령이 타계한2009년 8월까지 30여년간 이어졌다. "DJ를 모신 게 내 인생에서 정말 행운이었다"고 말하는 그다.

그에게 김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고, 주위 사람들을 가르친 분'이다. 그는 "스스로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DJ를 보고 배워 내 몸에도 노력이 뱄다"고 말했다. DJ 정신을 이어가는 후배들의 노력은 그가 서거한 지 5년 여인 지금도 여전하다. 매주 화요일 서울 동작구 현충원에는 동교동계 식구 30~40명이 모여 참배한다.


좋아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설 위원장의 모습에는 외면부터 김 전 대통령의 인상이 많이 묻어난다는 사람이 많다. 그는 "부부가 닮듯 닮게 됐다"고 말했다.
취미도 예외가 아니다.

설 위원장은 "DJ는 문화에 대한 애정이 크셨다"며 "후배들을 자주 연극과 영화를 보러 데리고 가셔서 요즘은 나도 후배들과 종종 보고 있다"고 말했다.

설 위원장은 "DJ께서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꽃꽂이하고,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 보는 것을 특히 좋아하셨는데 꽃은 바빠서 못 배웠다"면서 "그래도 동물은 싫어하는 편임에도 '동물의 왕국' 시청 만큼은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한장의 사진-15대 대선 DJ 대구 유세]

15대 대선이 열렸던 1997년 11월15일 대구 두류공원 선거 유세 현장. 설 위원장은 날아드는 돌을 막기 바빴다. 하지만 DJ는 설 위원장을 밀치며 앞으로 나와 말했다. "내게 돌을 던지세요." 설 위원장은 몸을 던지는 DJ에게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느꼈다. 그는 "누군가는 DJ를 두고 '영웅주의로 영웅이 됐다'고 말하지만 김대중은 스스로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대표 법안은]

설 위원장은 지난 국회의원 임기 10년 중 8년을 교육관련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6대 국회에서는 교육위 간사를 맡았다. 8년 만에 복귀한 19대 상반기 국회에서는 같은 당 신학용 의원에게 교문위원장을 양보했지만 후반기 국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설 위원장은 지난 교육위 활동 중 자신이 산파 역할을 했던 '학교운영위원회(학운위) 설치'를 의무로 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대표 법안으로 꼽았다. 1999년 개정안에 담긴 학운위 설치가 이뤄지면서 교육 현장의 투명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시 학내는 교장 비리 등이 자주 일어나서 문제가 많았다"며 "학교 운영의 투명화와 함께 학부모가 운영을 도울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반발하는 야당(한나라당)과 학교 교장을 일일이 설득해 법 개정을 이끌었다고 강조했다.


[연관 검색어→국민경선제]

설 위원장은 한국 정당 역사상 초유의 일 중 하나였던 '국민경선제'의 태동을 견인했다고 평가 받는다. '있었던 적도 없는' 국민경선제에서 승리해 대통령으로 뽑힌 이가 16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0년 5월 당시 민주당 서울 도봉을지구당 위원장이던 설 위원장은 서울시의원 재보선 후보 선출에서 평당원들이 직접 후보를 뽑는 상향식 공천을 제시해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당시 같은 취지인 국민경선제의 도입을 주장하며 대선 승리를 자신한 바 있다. 결국 성공했다.







[그의 사람들]

설 위원장은 동교동계 막내이자 고 김근태 의장(GT)이 좌장으로 있던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소속이다. 다른 동교동계 인사들이 비해 상대적으로 중립적으로 비춰지는 배경이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의 관계도 눈에 띈다. 설 위원장은 2007년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17대 대선 준비를 하던 손학규 캠프에 합류했다. 당시 재야에 있던 그는 캠프에서 상황실장 역할을 하며 동교동계가 손 전 지사를 지원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게 했다.

5년이 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에도 인연은 이어졌다. 민평련 측 일부 인사들은 당시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로 손학규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당시 설 위원장과 함께 손 캠프를 도운 민평련 동료들은 우원식, 박완주 의원 등이다.

[이 사람의 한마디]

"지난 대선 자체가 심각한 부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이 선거 결과가 승복할 수 있는 것이었느냐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난해 10월22일 설 위원장은 당시 민주당 긴급 의원총회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외압 논란과 관련, "선거가 100만표 차이로 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상적인 선거였으면 도대체 어떻게 됐을까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며 이 같이 말했다.

설 위원장은 '저격수'의 원조격이다. '선당후사'의 자기 희생으로 평가 받기도 하지만 때론 공세의 빌미가 되고 했다. 이 발언도 그랬다. 김태흠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민주당은 그동안 대선불복에 대해서 치고 빠지기를 하더니 이제 대놓고 대선 불복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설 위원장은 이후 한 라디오 방송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당에서 어느 누구도 대선 불복을 말하지 않는다"며 "해당 문제에 대해 다시 환기한다는 입장이었고, 달라지는 상황에 자세 변화가 필요하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요! 주의]

할 말은 하는 그의 기질은 정치인으로서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무기지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지난 2002년 16대 대선 당시 기자회견을 열어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로비스트인 최규선씨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대선 승리 후 검찰 수사에서 거짓으로 밝혀져 허위사실 유포죄로 처벌돼 피선거권이 10년간 제한됐었다. 2007년 사면복권될 때까지 재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식 의원이 조정하라" 與도 인정한 협상파트너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번 재보선에서 뼈아픈 패배를 했습니다. '야당, 이대로는 안된다'는 통렬한 질책도 들었습니다. 사즉생의 각오로 당을 다시 세우고 혁신하기 위해 첫째 공정과 신뢰를 근간으로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하나되는 새정치연합이 강한 야당'입니다."

조정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52)의 원내대표 선거 출사표는 무너져 가는 새정치연합을 진단하고 추구해야할 가치를 제시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하나되는 야당'이라는 말에는 최근의 당내 '분열상'이 담겼다. 그가 내민 해결책은 '공정성'이다.

'공정과 소통의 리더십'은 흩어지는 당을 봉합하고 강한 야당으로 거듭날 그의 키워드다. 목표는 2017년 정권교체다.

그는 2012년 민주당 야권통합협상단장, 총선 공천심사위원과 지방선거 공천심사위원장, 2013년 조직강화특별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본 풍부한 경험이 있다.


원내대표 후보로서 '상생'의 가치를 내걸었지만 그 뒤엔 '투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도 들어있다. 18대 원내대변인 시절 4대강사업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을 'MB악법'으로 규정하고 헌정사상 최장기 본회의장 농성을 이끌었던 그다.

그래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발휘해 선명하게 투쟁하고 실리적으로 협상하겠다"는 말에는 '투쟁'이 두드러지게 읽힌다. '협상과 투쟁'을 모두 담은 그의 출사표가 어떻게 쓰일지 주목되는 이유다.

원내대표로서의 성패도 여기에 달렸다. 그의 행보를 돌아보면 실리적 협상보다는 투쟁의 역사가 두드러진다. 과거 '투쟁의 조정식'을 뛰어넘어 '상생의 조정식'을 입증할 때 그도, 새정치연합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학생 조정식 → 학생운동은 했지만 졸업도 했다]
어린시절 조정식은 수줍고 조용한 아이였다. 자연에서 뛰놀고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달에 착륙한 아폴로호를 보며 우주과학자를 꿈꿨고 커서는 건축가로 꿈이 바뀌었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그려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세상 밖에 눈을 뜬 건 '혜화동 로터리'에서였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고려대와 성균관대 학생들이 종로통을 향해 시위 행렬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왜?'라는 의문을 가진다. 10·26 사태 때는 아버지와 서울대를 다니던 형이 민주화의 가치를 두고 논쟁하는 것을 보며 마음에 요동이 온다. 어린 조정식도 그렇게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재수를 해 연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그는 '인간연구회'라는 서클에 별 생각없이 들어간다. '자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인간연구회는 1978년 '인간걱정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중앙정보부에서 "학생이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느냐"며 이름 개명을 요구받았을 만큼 유명한 학생운동 조직이었다.

조 의원은 인간연구회에서도 두드러지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금서를 나눠읽고 선배들과 술 한잔 하며 격론을 벌이는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학생운동 전면에 나선 것은 우연한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점심을 먹고 도서관 앞 잔디밭에 친구들과 앉아있던 그는 기습시위를 벌인 학생들에 뒤섞여 사복경찰에게 끌려간다. 난생 처음 경찰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은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훈방된다.

하지만 알고 지내던 선배 다섯은 시국 관련 유인물을 뿌린 혐의로 구속됐다.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그가 진지하게 학생운동으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된다.

학생운동 선봉장에 처음 서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1985년 4월 그는 신학기를 맞아 친구들과 대대적인 투쟁을 계획한다. 하지만 시위 며칠 전 투쟁을 주동하기로 한 친구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힌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구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시위에 단순히 참여하는 것과 '주동'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시위 주동은 곧 구속과 대학 제적을 뜻했다.

그가 머뭇거렸던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였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중도 포기했던 아버지는 "대학은 꼭 졸업해야 된다"는 말씀을 거듭 하셨다. 그가 학생운동에 온 몸을 던지지 못한 이유일 지 모른다. 그는 결국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주동자로 나서게된다.

하지만 이것 또한 투신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끝까지 방황했다. 그는 구속 대신 군대를 택했고 학생운동을 함께했던 동지들과는 연락을 끊으며 군대에서 빌미를 잡힐 일도 하지 않았다. 결국 대학생 조정식은 아버지의 뜻대로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진짜 투쟁은 생활 속에…프레스공 조정식]

그의 투쟁은 오히려 대학 졸업 후 본격화된다. 그는 취업 대신 노동현장을 향하므로서 생활 속 투쟁을 선택한다.


대학 졸업장은 걸림돌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생산직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기술 없는 초보자를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기계 등의 원판을 찍어내는 프레스공으로 공장에 들어갔다. 6개월만에 그런대로 능숙해 질 수 있었다.

프레스 공장은 2교대나 3교대로 돌아가며 기계를 굴렸다. 작업 능률을 올리기 위해 동료들은 안전장갑 없이 프레스를 찍었고 손가락 잘리기가 다반사였다. 그들은 이를 큰 사고를 막은 '액땜'이라 여겼다. 조 의원도 수차례 손가락이 절단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 가난하지만 인간적인 동료들 속에서 그는 노동자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뼈속까지 노동자일 수 없었다. 대학 졸업자라는 신분이 들통날까 결혼식에 공장 동료들도 부르지도 못했다. 그 자리는 대학 선후배들이 채웠다.

노동자의 삶 4년차, 이때 '정치인 조정식'으로서 눈뜨는 사건이 발생한다. 1990년 2월 9일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민주당, 공화당 등 3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이 출범한 것. 그에겐 국민이 선택한 '전제와 균형'이라는 의회구조를 몇몇 정치인이 야욕으로 깨버린 '반민주야합'일 뿐이었다.

[더러운 정치의 걸레질, 제정구 의원을 만나다]
정치인 조정식으로서의 첫 시작은 '꼬마 민주당'의 당무기획실 전문위원을 맡으면서부터였다. 학생운동을 함께 한 대학 선배가 물려준 자리었다. 나이 서른 무렵. 당의 정책과 국회 대책, 대변인 논평까지 담당하는 싱크탱크 자리였다. 그의 보고서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됐다.

민주당은 DJ를 14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했다. 당시 조 의원은 민주당 청년특별위원장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물결청년단'에 합류한다. 그 자리에서 향후 정치인생의 스승이 될 제정구 선생을 만난다.

"부정한 돈을 절대 받지 않으며 모든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 경조사에 화환을 보내지 않을 것이며 고급 승용차도 타지 않겠다. 또한 국회 회기 중에는 주례도 서지 않겠다"

제 선생은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한 한국 빈민운동의 대부로 '깨끗한 정치선언'을 주도하면서 14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걸레론'을 내세우며 더러운 정치판을 닦고 쓸겠다고 했다. 조 의원은 제 선생을 보며 그의 길을 따라가기로 다짐한다.

["조정식한테 조정하라고 해"]
국회에서 조 의원은 상대당으로부터도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지난 18대 국회 말 산업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대형마트의 영업규제 관련 법안심의를 하던 때 일이다. 당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은 당내에서 소통이 어렵고 대화를 꺼리는 상대로 인식됐다.

그런 권 의원도 조 의원만은 카운터파트너로 인정했다고 한다. 대형마트 영업과 관련해 여야와 정부, 업계의 이견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 권 의원이 찾은 사람도 조 의원이었다.

"조정식 의원 어디갔어? 빨리와서 조정하고 정리하라고 해."

19대 국회에서도 조 의원의 '조정'은 계속됐다.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에서 세법을 심의할 때 일이다. 기재부 차관 출신인 김광림 새누리당 의원이나 유성걸 의원도 조 의원이 자리를 비우면 "조정식 의원님 빨리 모시고 오세요. 조 의원이 자리를 비우니 진도가 안나가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 의원이 "근거없는 패기나 불안한 판단력은 오히려 당을 더 큰 위기로 몰고갈 수 있다"며 "여당과의 협상과 조정능력을 갖추는 게 원내대표로서 중요한 덕목이 된다"고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다.

조 의원의 협상력은 같은 당 내부에서도 유효하다. 2013년 기재위 조세소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주장을 달리하던 당내 의원들까지 설득시킬만큼 뚝심도 있다.

당시 세법 개정안 가운데는 중소·중견기업의 기업상속을 돕기 위한 '상속세법 개정안'이 있었다. 기업상속공제 적용 대상을 매출액 2000억원 이하에서 3000억원 미만으로 상향해 적용대상을 늘리는 것이 골자였다.

당 내부에서는 기업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이 뚜렷했다. 하지만 조 의원은 지역구에서 만난 기업인들의 고충을 토대로 창업주의 노회와 사망에 따른 가업승계의 문제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기업상속세를 내기 위해 멀쩡한 기업을 팔거나 생산시설과 부지를 매각해 일자리를 줄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조 의원은 국세청장과 국토부장관은 역임한 이용섭 전 의원에게도, 경제학 박사이자 교수였던 홍종학 의원에게도 논리로 밀리지 않았다.

한달간 이어진 팽팽한 논쟁 끝에 결국 경제 전문가인 동료 의원들도 "조 의원 말대로 합시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대표법안]
조 의원이 발의한 대표법안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금융거래에서 재산을 숨기기 위해 차명계좌를 이용하거나 범죄수단으로 악용되는 대포통장 등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금융거래의 실질 명의를 사용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금융실명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한 이 법안은 조 의원안이 대안으로 반영됐다.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으로는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을 높이고 조세서비스를 강화하는 목적의 '국세청법'이 있다. 조 의원은 국세청이 그동안 국세행정이라는 본연의 업무 외에 국가권력의 하부조직으로서 정치적 의도와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세무조사를 진행하는 등 부정적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국세청의 기본조직 및 직무범위 등을 명확하게 제정함으로써 국세행정의 중립성과 전문성을 제고하려고 법안을 제출했지만 정부와 여당 및 국세청의 반발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주변엔]
그의 후원회장은 같은 당 소속인 원혜영 의원이다. 국회의원이 다른 의원의 후원회장은 맡는 일은 이례적이다. 원 의원은 그를 '합리적인 사람', '이야기가 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또 '대화와 타협으로 결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조 의원이 차기 원내대표 후보로서 갖고 있는 최대 경쟁력을 설명해주는 평가다.

[이 한장의 사진]
1996년 민주당 당무기획실 전문위원이던 당시 조정식 의원이 제정구 전 의원과 회의를 열고 있다. 조 의원은 제 전 의원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정치적 스승이라고 말한다.





[요주의!]
차기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로서 위축된 당을 통합하고 이끌 철학이 명쾌하지 않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협상 상대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비해 철학이나 가치관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3선 의원이지만 그만큼의 대중적 인지도나 영향력은 쌓지 못한 편.

[프로필]
△동성고 △연세대 건축학과 △제정구 의원 정책보좌관 △17대 국회의원 △18대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변인 △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18대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19대 국회의원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독립' 이종걸, '경제민주화 시즌2'로 네번째 도전








수도권 4선 중진이다. 경제·금융분야의 전문성도 있고 독립운동가의 손자로서 성장과정도 반듯하다. 여기에 사람까지 좋은데 '야성(野性)'이 너무 강해 주요 당직을 맡지 못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더 아쉽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다.

이 의원은 4번째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 4일 '경제민주화 시즌2'를 제안했다. 2012년 대선과정에서 '경제민주화' 화두를 여당에 빼앗긴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정책정당의 면모를 갖춘 야당이 되기 위해 대안으로 연금개혁·조세개혁·보육개혁·청년일자리 확충·사회적 경제등 12가지의 세부과제를 내놨다.

원내대표만 4수했던 그간의 경험이 배경이 됐을까. 이 의원의 경제민주화시즌2는 원내대표 출마용을 넘어서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이번에야 말로 당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하는 이 의원. 위기의 야당을 살릴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4선 국회의원, '존재감을 키워라']
야당 내에서 이 의원은 '선명성'이 강한 인사로 분류된다. 독립운동가의 자손, 인권변호사로의 그의 인생 전반부가 정부와 대기업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대여 강경파로 만든 배경이다.


수도권의 4선 국회의원이면 정치인으로서의 경쟁력을 유권자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4선 국회의원이면 상임위원장, 원내대표, 최고위원, 당대표를 포함한 당직등 웬만한 자리를 거쳤을 것 같지만 이 의원은 18대에 교육과학위원장 1년과 민주통합당 시절 최고위원을 한번 한 것 외에 뚜렷한 직책을 맡은 적이 없다.

당내에 뚜렷한 계파색이 없는 것이 이처럼 상대적으로 낮은 '존재감'의 첫번째 이유다. 서울 출생에 수도권 국회의원으로 정치입문도 특별한 지역적 배경을 업고 시작된게 아니었다.

16대 총선 당시 소위 'DJP 연합공천'이 무산되면서 급하게 출마를 결정했고 할아버지 이회영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지금의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이후 내리 4선에 성공할 정도로 이 의원의 지역기반은 탄탄하다.

그러나 '4선'이 꼭 훈장만은 아니다. 또 뽑아달라고 하기에는 새로운 '모멘텀'이 필요하다. 이번 원내대표 출마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4선 국회의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키워드 - '등록금 상한제', '장자연 리스트']
이 의원은 15년째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웬만한 상임위는 다 섭렵했다. 그는 과거 공정거래위원회 하도급 자문위원을 한적 있다. 이 때의 경험으로 '공정거래법규집'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19대 국회 후반기에서는 정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무위에서 이 의원은 정부와 대기업에 '아픈' 법안을 주로 낸다. 최근에 낸 전자금융거래법은 금융사고발생시 금융회사에 책임을 지우는 법안이다. 작년에는 보험회사의 자본운용비율을 계산방식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법안을 제출해 법안심사소위원회 논의에서 금융당국을 당황케 하기도 했다.

지난 2010년 교육과학기술위원장 시절에는 '등록금 상한제'를 도입하는 법안처리에 앞장서기도 했다. 법제사법위원장이 아닌 경우 상임위원장이 법안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 의원은 당시 여당이 '취업후 학자금제도'를 강력하게 주장하자, 등록금 인상비율을 제한하는 '등록금상한제'를 동시에 통과시키며 대여 협상력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다.

장자연 리스트 폭로는 이 의원의 의정활동에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다. 이 의원은 2009년 4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언론사주에 대한 연예인들의 성상납 내용을 담은 '장자연 리스트'를 폭로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이 의원에 명예훼손 등의 소송을 제기했지만 잇달아 패소했고 2013년 2월에 4년 만에 관련 소송을 일괄 취하했다.

[그의 과거는 - 민변간사, '우조교 사건']
1993년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일명, 우 조교 사건)은 서울대 화학과 우모 조교가 같은 교수인 신 모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최초의 성희롱 사건이다. 6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신 교수가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판결이 나왔다.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사건으로 당시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활동시절 이종걸 의원은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당시 이 사건의 공동변호인이었다. 이후 이 재판으로 1998년 여성운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의원의 변호사시절은 영화 '변호사'의 배우 송강호를 떠올리게 한다. 인권변호사시절의 이 의원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인연이 많았다.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건등에 변호사로 활동했었다.

"시국사건은 힘들었다. 접견을 가면 군기잡는다고 의자부터 부수곤 했다. 당시 학생들은 고문당한 흔적이 몸에 선연했다. 영화 변호사와 똑같다. 어딘지도 몰라서 물어물어 가는데 일주일걸린다. 선임계도 당연히 없다. 옆에 배석한 경찰관에게 심리적으로 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시국사건 피의자들의 얼굴에)화색이 든다"

이 의원은 이 시절에 대한 부채감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운동권'의 전통이 있다. 이분들에 비하면 나는 변호사로 뒤에서 지켜만 봤다"면서 "민변 시절을 생각하면 박상옥 대법관후보자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을 몇번이고 그만두려고 했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인권변호사의 고민이 담겨 있다.

[아!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
이 의원은 신민회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이회영 선생은 일제시대 형제들 다섯명과 함께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났다. 6명의 형제들 중 다섯명이 독립운동중에 순국했고 대한민국 정부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만이 광복을 맞이했다.

유년시절 이 의원은 이회영 선생의 부인인 할머니 이은숙 여사와 함께 보냈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였던 이회영 선생에 대해서 잘 몰랐다. 1970년 무렵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살았던 삶을 기록한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 서종기'를 집필하던 할머니의 모습만을 기억한다.

그는 3선 국회의원이 된 후인 2010년 이회영 선생의 발자취를 쫓는 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여행 다녀온 후 쓴 책 말미에 "할아버지와 우리 가문, 그리고 동료들의 삶의 흔적을 보고 나니, 이분들처럼 불의와는 타협하지 하는 칼날같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적었다.

[그의 사람, 박원순]
이종걸 의원은 사법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된 이유를 "사법개혁운동을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2기수 선배인 박원순 서울시장는 1995년부터 법무법인 '나라'를 만들어 한솥밥을 먹었다. 이 의원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박원순 변호사와 같이 노동법과 안기부법 등의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조그만 사무실에 모여 시작했는데 그 동안 갈수록 커지고 더 훌륭해졌다"고 말했다.
인권변호사 시절 그에겐 박 시장이 '큰 빽'이었다. 이 의원은 "차갑고 냉정하며 거스를수 없는 대선배, 삶의 멘토"로 박 시장을 회고했다. 이후 이 의원은 박 시장과 함께 참여연대를 만드는데도 힘을 보탰다.

[이한장의 사진]







[대표법안 -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
지난 2월 14일 이종걸 의원은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 사고에서 금융사에 무과실 책임을 부여하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외국에서는 전자금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금융회사에 엄격하게 책임을 묻지만 우리는 특정된 기술적 유형외에는 제대로 보상을 받기 어렵다. 피해 보상도 이용자 쪽이 고의 중과실에 대한 입증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의원이 대표발의한 전자금거래법 개정안은 금융사기 사고에 대해 금융사에 무과실 책임을 부여하고, 도난 분실에 의한 사고의 경우 법에 정해진 기일에 따라 금융사와 이용자가 합리적 범위내에서 책임을 분담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의원은 "핀테크 산업 부흥을 위해 금융보안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상황은 금융보안의 암흑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면서 "지금은 금융보안 분야가 '관치 보안'에서 '자율 보안'으로 전환되는 시기인데 이에 맞게 금융보안에 책임 문제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통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법안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요주의, '강성종걸'·'지각종걸']
이종걸 의원은 4선 국회의원이지만 당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고위원을 한번 하기는 했다. 3선때면 관례적으로 맞게되는 상임위원장도 겨우 1년 임기였다. 원내대표에도 4차례나 나섰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우윤근 현 원내대표와의 대결에서도 1차에서 승리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10여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특정 계파의 지지가 불분명한 상황에 대여 강성이미지와 협상능력에 대한 의문이 매번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다.

강한 발언과 설화(舌禍)로 18대 국회에서 두번, 19대 국회에서도 한번 여당 의원들에 의해 징계안이 발의됐다.


이 의원이 회의 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야당 관계자들은 국회의원들이 약속이 많아 회의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 의원의 지각은 좀 지나치다는 이야기다. 원내대표 출마를 앞두고 '정각 종걸'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프로필]
△서울 1종로(1957년생) △경기고-서울 법대 △사법시험 30회 △전 법무법인 나라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민주사회위를 위한 변호사 모임 기획간사 △사단법인 한국성폭력 상담소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시서실장차장 겸 수행실장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국회 일자리 만들기 특별위원회 위원장 △18대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장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경기 안양 만안구 4선 국회의원(16~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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