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와 이이첨의 잘못된 만남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5.04.27 10:11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23 이이첨 : 인조반정을 부른 광해의 국정파트너

세종대왕에게는 황희 정승이 있었다. 한글창제와 같은 세종의 애민정치는 사대부들의 불만을 다독이며 노련하게 국정을 이끈 황희가 없었다면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개혁군주 정조는 명재상 채제공이 보필했다. 신해통공(시전의 특권을 폐지해 상업을 촉진한 조치)등 정조의 치적도 시대흐름에 기민하게 대처한 채제공의 역할이 컸다.

조선에서 군주와 신하의 파트너십은 국정의 성패를 좌우했다. 조선은 ‘군신공치(君臣共治 :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림)’의 성리학 이념을 기초로 세워진 나라다. 임금 혼자 결정해서 밀어붙이면 나쁜 정치고, 신하들과 의논해 합의를 이뤄야 좋은 정치다. 특히 사림이 득세한 후로는 붕당의 수장과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광해도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그는 후궁 소생으로 정통성이 취약하지 않은가.

드라마 ‘화정’에서는 대북 영수 이이첨이 악역으로 등장한다. 그가 바로 광해의 국정파트너였다. 이이첨은 연산군 시절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한 이극돈의 5대손이었다. 사림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게다가 학문도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에게 배웠다. 남명은 퇴계 이황의 관념론적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천적인 심성수양을 강조했다. 당색을 떠나 퇴계를 떠받드는 사림에서 남명학파는 비주류였다.

광해가 그럼에도 이이첨을 파트너로 택한 것은 정치구도 때문이었다. 그는 왜란을 거치며 백성의 고초를 누구보다 가슴 아파 했다. 대동법, 중립외교 등 파격적인 시무책을 추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손발이 돼줄 사람이 없었다. 인목대비의 친정을 비롯한 서인은 발목을 잡았고, 이황의 직계임을 자부하는 남인은 소극적이었다. 결국 광해는 소수파지만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이첨과 대북을 내세워 과감하게 시무책을 펼치기로 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1613년 박응서, 서양갑 등 이른바 ‘강변칠우’가 살인강도 혐의로 잡혀왔다. 그들은 명문가 서자 출신들로 광해군 즉위 후에도 처지가 달라지지 않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강도행각을 일삼았다. 그런데 옥에 갇힌 박응서의 입에서 뜬금없이 역모가 흘러나왔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것.


드라마에서는 이덕형의 입을 빌려 이를 기만과 사술이라고 비판한다. 시무책에 걸림돌이 되는 반대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이이첨이 역모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제남은 죽고 서인과 남인은 유배를 떠나거나 관직을 잃었다(계축옥사). 뿐만 아니라 영창대군도 강화도에서 살해당했으며(1614년) 인목대비 역시 폐위를 피하지 못했다(1618년). 이 일로 광해는 군신공치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림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더 심각한 건 민심이었다. 광해는 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백성의 마음을 얻은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내친 패륜은 백성을 뜨악하게 만들었다. 민심이 떠난 광해 정권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1623년 서인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이이첨은 참형에 처해졌다.
군신 간의 파트너십으로 볼 때 광해와 이이첨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물론 이이첨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사실 그에게 만고의 간신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은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들이었다. 이이첨이 이극돈의 후손이고 남명학파라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최근 들어 광해가 재조명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국정파트너인 그의 행적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광해의 시무책을 추진한 것은 누가 뭐래도 이이첨이었으니.

다만 국정을 조율하는 것이 파트너의 임무라면 아쉬움은 남는다. 다른 의견을 가진 세력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게 정치인데 이이첨은 그것을 망각했다. 또 주군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남겨 민심이 떠나게 한 점도 아프다. 남명 조식은 ‘민암부’에서 백성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고 했다. 이이첨이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성찰을 배웠다면 조선의 운명이 그리 틀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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