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나라? 또, 저런 죽음을?'
'그대들을 망각 속에 묻지 않겠습니다. 진실 위에 그대들의 이름을 새기겠습니다.'
황홀한 벚꽃길을 따라 걸으면 작지만 강한 '노란 현수막'이 줄지어 나타났다. 단원고 희생 학생 부모들이 손수 새긴 글은 어느 문구보다 준엄하다.
세월호 1주기를 사흘 앞둔 안산은 '이젠 잊자'는 세상에 "잊지 말자"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1년 전 줄을 잇던 전국적 조문행렬과 통곡 소리, 취재 열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합동분향소에는 향이 피워지고 있으며 단원고 2학년 교실은 지난해 4월16일에 멈춰있으며, 희생자 수백 명의 부모와 형제자매, 친구들, '팽목항'의 상흔을 품은 자원봉사자들과 공무원들이 숨죽이며 아픔을 삭이고 있다.
"보름쯤 버텨보려다 힘들더라고요. 트라우마센터를 찾아갔죠. 진료 의뢰서만 끊어 주길래 지정된 병원 정신과 가서 치료받았어요. 가족들은 입원치료가 가능한데 우린 안 된대서 보름쯤 통원치료하고 말았죠. 지금도 양쪽 귀가 자꾸 울려요. 세상이 기가 막히다는… 멘붕이랄까? 잠을 못 자겠더라고. 악몽에 시달리고. 떠난 지 5개월인데 안 가셔요."
지난해 4월16일부터 7개월간 진도 팽목항을 지켰던 김건주 안산시자원봉사센터 활동지원팀장은 진도를 떠난 지 다섯 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진도를 떠나지 못했다. 실종자 9명 가족들과는 이틀에 한 번씩 통화하며 형제처럼 지낸다.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관계를 끊어낼 수 없다.
김 팀장은 "트라우마를 우려해 1주일 이상 장기봉사를 못하게 하는 게 매뉴얼이었지만 매일 타일러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며 "장기봉사자 중 최소 20명은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팽목항에 주기적으로 내려가고 있고 안산시 공무원 중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지금도 하루 4명이 진도에 파견된다.
"집에 와서 처음엔 빗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으면 창문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맨발로 뛰어나오고. (팽목항) 가족천막 날아가는 줄 알고… 신경안정제 먹고 한 달을 누워있느라 12kg까지 쪘는데 10월부터 다시 봉사다니며 좀 회복됐죠."
신씨는 '가족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다 3개월간 틈틈이 손뜨개질로 노란 원피스 304개를 만들어 팽목항 방파제에 걸어놓았다. '힐링' 방법인 셈이다. 신씨는 "요즘도 내 자식이 바다에 빠져 죽는 꿈을 가끔 꾸는데 그럼 꿈에서 숨을 못 쉰다"며 "당사자는 오죽하겠어요?"라고 되물었다.
한편 '기억하는 이들' 반대편엔 '잊으려는 이들'이 있다. 공감해서 아픈 이들 주위엔 세월호에 대한 반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최근 정부가 일방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예상 배보상액을 발표하면서 양측의 간극은 더욱 커졌다. 유가족들은 이웃들에게 '자식 팔아 돈 버니까 좋냐', '8억 받아 축하한다'는 말을 듣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 2월 '안산시민 1000인 대토론회'에서는 피해, 참사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란 현수막을 정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아픔을 잊고 경기회복에 나서자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한 안산 시민은 "세월호 얘기만 하면 주변에서 눈치를 줘 옆이 후끈하다"며 "지금 세월호는 안산에서 금기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고통을 외면했을 때와 직시했을 때 결과는 다릅니다. 일제 36년 치욕, 한국전쟁의 숱한 고통을 우린 어떤 식으로 외면하고 묻었나요? 지금의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면 같은 방식의 참극이 벌어집니다. 10년 뒤, 20년 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잘했다, 못했다 평가할 기준이 뭘까요? 600명의 엄마아빠, 300명의 형제자매, 75명의 생존자들이 우리들과 함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이게 기준이 될 것입니다. 엄마아빠가 싸우는 진실과 정의를 외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안산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엔 조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맨 앞줄 영정사진 속 9명은 아직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분향소 한쪽에 전시된 '하늘로 간 수학여행' 사진전 속 학생들은 기울어지는 세월호에서 마냥 해맑게 웃고 있다. 우린 무엇을 기억하고 잊어야 할까.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