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오늘도 잘 살고 있다

머니투데이 박정태 경제칼럼니스트 | 2015.03.27 10:00

투자의 의미를 찾아서<77>

#은행은 아침부터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앉아있는 사람보다 서있는 사람이 더 많았고 여기저기서 휴대폰 신호음과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번호를 나타내는 창구 상단의 화면이 이따금 바뀔 때마다 대기자 숫자는오히려 늘어났고 불평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이날부터 접수가 시작된 안심전환대출로 갈아타기 위해 은행에 나온 사람들은 대기표를 손에 꼭 쥔 채 몇 시간이고 참고 기다렸다.오늘 하루 고달픈 것만 견디면 매달 이자로 나가는 돈을 다문 얼마라도 줄일 수 있는데 누가 이런 불편을 마다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당초 정부가 책정했던 한 달치 한도 5조원이 하루 만에 거의 다 소진되자 금융위원회는 20조원으로 잡았던 올해 안심전환대출 한도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정책 가운데 보기 드물게 호응도가 높게 나와 틀림없이 실무자들도 상당히 고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햇볕 따뜻한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그늘진 응달도 있으니 이번 안심전환대출에 대해서도 몇 가지 문제점과 불만들이 제기되고 있다. 제2금융권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과 기존에 고정금리로 대출받았거나 원리금을 함께 갚아나가던 사람을 제외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불평이 대표적이다. 또 이미 확정된 대출조건을 정부 정책으로 변경해줌으로써 대출받은 사람에게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은행에게는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옳으냐 그르냐, 모럴해저드를 부추겼느냐의 여부를 떠나 고마운 정책임에는 틀림없다. 안심전환대출로 인해 은행들이 줄잡아 1500억원대의 손해를 입는다고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 시중은행 한 곳의 은행장과 금융지주 회장 연봉이 성과급을 포함해 30억원이 넘고, 이들 각자가 마케팅이나 후원 사업에 쓸 수 있는 소위 백지예산만 1000억원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기존에 변동금리로 1억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은 이번에 안심전환대출로 갈아탐으로써 대충 월 8만원이 조금 넘는 이자 부담을 덜 수 있다. 연 1%포인트의 금리인하 효과를 보는 셈인데 서민이나 중산층 입장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횡재다. 그래서 다들 은행에 나와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인 듯한 말쑥한 정장의 40대 남성, 자영업자로 보이는 등산복 차림의 50대아저씨, 그리고 평상복을입고 나온주부와 엄마 손에 이끌려 나온 어린아이들.어떤 이는 직장상사에게 몇 시간 자리를 비우겠다고 어렵게 양해를 구했을 것이고, 아예하루 휴가를 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가게 일을 다른 이에게 맡겼을 것이고, 오늘 하루 집안일을 접어둔 채 서둘러 나온 주부도 있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이들은 무표정한모습으로 무료하게 그리고 고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볼 일이 있어 은행에 갔던 나는 결국 일을 나중으로 미룬 채 발길을 돌렸다. 은행 문을 나서는데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황지우 시인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이 시는제목 그대로 보험회사 직원 송일환 씨가 1983년 어느 봄날 아침 버스토큰 5개와 종이컵 커피, 솔 담배, 한국일보 신문 한 부를 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해체시 형식의 풍자적인 낱말들이 이어지는데 신문기사와 삽화까지 옮겨다 놓고는 뒷부분에다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大盜) 조세형이 훔친 값비싼 물건들을 나열한다.

사실 이 시에서 아름다운 시어(詩語)나 감성을 자극하는 시 구절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대목만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오늘도 송일환 씨는 잘 살고 있다. 생명 하나는 보장되어 있다.” 이 시가 발표된 1983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133달러였다. 주택보급률은 70%에 불과했다. 지난해 국민소득은 2만8180달러에 달했고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난 오늘 불쑥 이 시가 떠오른 것은, 다들 이렇게 잘살게 됐지만 여전히 생명 하나 보장 받은 채 그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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