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해서 당초 정부가 책정했던 한 달치 한도 5조원이 하루 만에 거의 다 소진되자 금융위원회는 20조원으로 잡았던 올해 안심전환대출 한도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정책 가운데 보기 드물게 호응도가 높게 나와 틀림없이 실무자들도 상당히 고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햇볕 따뜻한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그늘진 응달도 있으니 이번 안심전환대출에 대해서도 몇 가지 문제점과 불만들이 제기되고 있다. 제2금융권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과 기존에 고정금리로 대출받았거나 원리금을 함께 갚아나가던 사람을 제외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불평이 대표적이다. 또 이미 확정된 대출조건을 정부 정책으로 변경해줌으로써 대출받은 사람에게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은행에게는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옳으냐 그르냐, 모럴해저드를 부추겼느냐의 여부를 떠나 고마운 정책임에는 틀림없다. 안심전환대출로 인해 은행들이 줄잡아 1500억원대의 손해를 입는다고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 시중은행 한 곳의 은행장과 금융지주 회장 연봉이 성과급을 포함해 30억원이 넘고, 이들 각자가 마케팅이나 후원 사업에 쓸 수 있는 소위 백지예산만 1000억원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기존에 변동금리로 1억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은 이번에 안심전환대출로 갈아탐으로써 대충 월 8만원이 조금 넘는 이자 부담을 덜 수 있다. 연 1%포인트의 금리인하 효과를 보는 셈인데 서민이나 중산층 입장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횡재다. 그래서 다들 은행에 나와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인 듯한 말쑥한 정장의 40대 남성, 자영업자로 보이는 등산복 차림의 50대아저씨, 그리고 평상복을입고 나온주부와 엄마 손에 이끌려 나온 어린아이들.어떤 이는 직장상사에게 몇 시간 자리를 비우겠다고 어렵게 양해를 구했을 것이고, 아예하루 휴가를 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가게 일을 다른 이에게 맡겼을 것이고, 오늘 하루 집안일을 접어둔 채 서둘러 나온 주부도 있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이들은 무표정한모습으로 무료하게 그리고 고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볼 일이 있어 은행에 갔던 나는 결국 일을 나중으로 미룬 채 발길을 돌렸다. 은행 문을 나서는데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황지우 시인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이 시는제목 그대로 보험회사 직원 송일환 씨가 1983년 어느 봄날 아침 버스토큰 5개와 종이컵 커피, 솔 담배, 한국일보 신문 한 부를 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해체시 형식의 풍자적인 낱말들이 이어지는데 신문기사와 삽화까지 옮겨다 놓고는 뒷부분에다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大盜) 조세형이 훔친 값비싼 물건들을 나열한다.
사실 이 시에서 아름다운 시어(詩語)나 감성을 자극하는 시 구절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대목만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오늘도 송일환 씨는 잘 살고 있다. 생명 하나는 보장되어 있다.” 이 시가 발표된 1983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133달러였다. 주택보급률은 70%에 불과했다. 지난해 국민소득은 2만8180달러에 달했고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난 오늘 불쑥 이 시가 떠오른 것은, 다들 이렇게 잘살게 됐지만 여전히 생명 하나 보장 받은 채 그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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