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서촌에 사는 즐거움..그리고 절망감

머니투데이 서정아 부국장 | 2015.02.24 15:01
'서촌'에 이사온지 3년이 다 돼간다. 요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 도심 부근의 낙후된 주거 지역에 자본이 급격히 들어옴으로써 임대료가 올라 살고 있던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는 경우) 이라는 말로, 서촌의 급격한 변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많지만, 여전히 이곳에 사는 즐거움은 크다. 어릴때 보던 모습을 간직한 집들, 골목들,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와 사직공원, 매동초등학교, 배화여고를 오르는 언덕길은 매일 가도 지겹지 않다. 10~20대들이 주말마다 찾아와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찍는 모습도 나에겐 다른 재미다.

이가운데서도 서촌살이의 즐거움 중 으뜸으로 꼽는 것은 종로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빌린 뒤, 인왕산 자락을 걷는 것이다. 종로도서관과 바로 아래 어린이도서관은 요즘 새로 지은 도서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외양이지만, 워낙 많은 이들이 찾아와 활기가 넘친다. 책구경 뿐아니라 사람 구경도 재미있다.

특히 어린이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옛동네 서촌에 생기를 돌게 한다. 종로도서관에는 50대이상으로 짐작되는 중장년들이 돋보기를 들고 두꺼운 책에 파묻혀 있기도하고, 학생들과 각종 고시생들은 하루종일 시험공부중이다. 모두들 고단해보이는 풍경, 하지만 언뜻 희망도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내 인생의 낙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두 도서관들 바로 아래 사직공원내 있는 사직단 일부를 조선시대의 사직단 모습 그대로 확대 복원하겠다는 문화재청의 사업 때문이다.

사직단 복원 사업으로, 종로도서관, 어린이도서관,사직동 주민센터, 사직파출소, 단군성전 등이 사라지게 된다. 문화재청은 총 300~400억원을 들여 올해부터 10년간 사직단의 원형을 복원할 계획이다. 사직단은 조선시대 왕이 토지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社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종묘와 함께 조선의 양대 국가제사시설을 이뤘다. 현재는 제단과 계단, 담장 등은 복원돼 있지만, 제단 주변에 있던 주요 전각 13개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공원 조성으로 사라진 상태. 문화재청은 이를 옛모습 그대로 재현해내면서 뒤쪽 도서관들과 단군성전이 있는 곳을 후원(後園)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 사업에 도서관등 기존 시설의 이전 비용은 없다.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다.

제사시설을, 더 정확히 말하면 제사시설 뒤 정원을 복원하기 위해 한해 200만명이 즐겨찾는 도서관을 없앤다? 토박이가 유독 많은 이곳 주민들은 당혹스럽기만하다. 반대모임도 많이 만들어졌다.


두 도서관은 건립부터 남달랐던 곳이다. 서울시립종로도서관은 조선독립을 위해 1920년 선조들이 민족자본으로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경성도서관)이고,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은 한국전쟁 후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1956년 세운 최초의 공공아동병원이었다가 1979년 유네스코 세계어린이해를 기념해 어린이도서관으로 리모델링한 한국 최초의 공공어린이도서관이다. 한국 어린이 역사, 그 자체다.

조선시대 종묘사직이라는 상징적 시설도 중요한 역사지만, 이들 도서관도 그 의미에서는 사직단 못지않다고 본다. 나라를 빼앗기고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하는 굴곡많은 시절을 거쳐 희망이 좀체 보이지않는 오늘날까지, 책에 기대어 생을 살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이 오버랩된다. 이쯤에서 과연 역사란, 역사의 복원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철거소식 이후에도 나는 매주 도서관을 오른다. 문득, 먼훗날 또 어떤 후손들은 2015년의 서촌 이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서깊은 도서관들과 인왕산 올라가는 길, 등산객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주민센터와 그 앞 나무들... 그 옛날 이곳이 2015년 서울의 몇 안되는 '마을'의 한 부분이라며 복원하고 싶어할지도? 혼자 거기까지 생각하다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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