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탈의 역사를 통해 본 혁신의 방향

테크앤비욘드 편집부  | 2015.01.18 06:30

모든 제도가 그렇듯 벤처캐피탈(Venture Capital) 제도도 역사상 진화의 산물이었다. 한 시대의 환경 아래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등장해 생존에 성공한 것이다. 벤처캐피탈이 어떻게 등장하게 됐는지 간략히 살펴보고 앞으로 벤처캐피탈의 혁신이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해 고찰해 본다.

대항해 시대 - 모험산업의 전형, 신대륙 개척
18세기 근대 과학기술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도 고위험 사업에 대한 자금 후원은 있었다. 15~16세기 유럽 각국이 황금과 향신료를 구할 목적으로 신항로와 신대륙을 개척하려 했던 항해 활동이야말로 모험사업의 전형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목적지를 찾을 가능성도 불투명했고 험난한 바다는 언제든지 배와 사람을 집어삼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는 왕과 도시의 군주, 지역의 부호들이 공격적으로 모험가들의 항해 자금을 후원했다. 이들이 바로 벤처캐피탈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콜럼버스 항해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통해 이뤄졌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통해 새로 발견된 지역에서 얻는 총이익의 10%를 받고, 이후 이뤄지는 교역활동에 대해 최고 8분의 1의 자본참가권을 여왕으로부터 약속 받았다.

산업혁명 시대 - 무역상이 신기술 투자
대항해 시대 신대륙의 발견과 신항로의 개척을 통해 대서양 일대에서 활동하던 무역상들이 신흥 부호로 떠올랐다. 이들은 상인뿐 아니라 은행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1600년에 설립돼 무려 270년간이나 활동했던 동인도회사도 투자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은 뒤 무역업을 통해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에서는 대서양 무역에 필요한 조선, 철강, 광산업이 발전하고 대금결제와 위험대응 등의 필요에 의해 근대적인 은행업과 보험업이 태동한다. 노예무역과 같은 비인도적 시련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서양 무역의 각종 전후방 산업에서 많은 부호들이 탄생했다.

이들은 이후 신기술 투자의 선구가 된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은 초기 탄광업자 존 로벅(John Roebuck)의 자금 후원으로 진행했으나 로벅이 파산을 하면서 그의 친구인 금속용품 제조 사업가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이 투자를 계속해 주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개발이 가능했다. 이후 19세기 초,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의 증기기관차 개발은 달링턴의 면방직업자인 에드워드 피스의 자금 후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엔젤 투자자였다.

근대 투자은행 신산업 투자처, 철도
영국에서 증기기관차 개발에 성공한 뒤 철도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신산업으로 부상했다. 철도라는 전례 없는 수송 기술의 등장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했고, 이로부터 근대적 형태의 투자 은행이 등장했다. 독일에서 지멘스가 1870년에 도이체방크를 설립했고, 미국에서 모건이 1864년 JP모건은행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종래의 대부업 중심의 모델에서 탈피해 채권과 주식 발행을 통해 철도사업자에 대한 적극적인 자금 지원을 하면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투자은행들은 당시 신발견, 신발명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전기와 화학 산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도이체방크는 바이엘과 지멘스, JP모건은 GE에 투자함으로써 20세기를 주도한 산업의 원형을 주조했다. 기업의 성장을 위한 지원을 했고, 필요한 경우 적절한 M&A를 주도하기도 했다.

2차 대전 후 미국 벤처캐피탈의 형성
그러나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투자은행의 벤처 투자는 소수 부호들의 자금에 의존했다. 당시까지는 기본적으로 엔젤투자가 주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벤처투자가 대중들의 자금 모집을 통해서 이뤄지는 형태로 바뀐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도리오(Georges O. Doriot)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출신 이민자인 도리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전시조달을 담당하면서 미국의 산업체와 대학 연구소의 군수품 개발을 주도했다. 전쟁 후에 MIT 대학과 협력하여 보스턴에 ARD(American Research and Development Corporation)를 설립했다. ARD는 최초로 일반 대중으로부터 공모 형식으로 조성한 펀드를 신기술 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이었다.

당시에 공모형 벤처캐피탈 펀드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두 가지다. 첫째, 증권시장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뮤추얼 펀드와 같은 공모형 상품들이 이미 보급되고 있었다. 둘째, 대량생산 체제가 보급되고 노동자의 임금 소득과 구매력이 현저히 상승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중산층이 형성돼 있었다.

ARD와 비슷한 시기에 휘트니나 록펠러 형제도 신기술 기업에 투자를 했지만, 개인 재산에 주로 의존했다는 면에서 공모형 펀드를 활용하는 ARD와는 달랐다. 당시까지 공모형 펀드는 주로 안정적인 채권이나 상장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관례였고, 위험도가 높은 신기술 시업에 투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당시 유명한 발명가 찰스 케터링(Charles Franklin Kettering)은 ARD가 5년 이내에 파산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회사는 25년 동안 성장했고 수백 개의 벤처 기업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7만달러에 투자한 디지털이퀴프먼트(DEC)의 지분 가치를 400만달러로 상승시켜 매각한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 동부에서 ARD가 성공하자 이를 모방한 벤처캐피탈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농업 지대로 알려져 있던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벤처캐피탈이 활성화하면서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모태가 됐다. 스탠포드대의 전기공학 교수였던 프레데릭 터만(Frederic Terman)은 일찍이 동부 MIT대학의 산학협력 매뉴얼을 모방해 스탠포드대학에 벤처의 토양을 심었다.
동부로 가고 싶어 했던 그의 두 제자 윌리엄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를 설득해 서부로 돌아오게 했고,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1939년에 ‘휴렛팩커드(Hewlett-Packard)’를 설립했다.

1958년에 드레이퍼는 미국 서부지역 최초의 벤처캐피탈로 알려져 있는 DGA(Draper, Gaither & Anderson)를 설립했다.
1961년에는 뉴욕의 투자은행 하이든스톤 출신의 록과 데이비스가 ‘데이비스앤록’을 설립했다. 록은 페어차일드의 초기 투자자이기도 했다. 1972년에는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가 설립되고, 발렌타인에 의해 세콰이어캐피털이 설립되면서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탈은 황금기를 맞게 된다. KPCB는 휴렛팩커드와 탠덤컴퓨터 투자로, 세콰이어캐피털은 아타리 투자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때 실리콘밸리의 주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등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터만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인 쇼클리를 초빙해 설립한 쇼클리반도체연구소의 연구원들이 1958년 페어차일드를 창업하고, 다시 페어차일드의 직원이 독립해 1968년에 인텔을 설립했다.

이런 IT기업의 창업 열풍에는 1972년에 설립된 아타리도 포함되는데 그곳의 직원 중 한 명이 바로 ‘스티브 잡스(Steve Jobs)’였다.

‘투자가 아니라 육성이 성공의 관건’
미국 벤처캐피탈의 성공 비결은 ‘투자’가 아니라 ‘육성’에 있었다. 자금을 공급하는 일보다, 경영진을 구성하고 적절한 자문을 제공함으로써 회사를 키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도리오에 따르면, 벤처캐피탈 업무의 본질은 자금을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동고동락하면서 기업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키우는 것에 있다. 흔히 애플은 잡스와 워즈니악 두 사람의 공동창업을 통해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잡스가 처음 세콰이어캐피털을 방문했을 때 발렌타인은 페어차일드 출신의 마쿨라를 애플의 초기 경영진에 합류시킬 것을 권유했다. 마쿨라는 페어차일드 출신으로 이미 부유한 엔젤 투자자이기도 했다. 그는 애플의 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벤처캐피탈과 기관투자자의 자금 유치를 주도했고 아직 경영의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잡스와 워즈니악의 역할을 보완했다.

모든 창업가가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질 없는 창업가가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져 자신의 경영 주도권만을 고집하다 보면 경영은 잘못된 길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에서는 벤처캐피탈을 경영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협조할 수 있는 문화가 비교적 보편화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예상되는 시장 규모와 마켓 캡은 투자 수익률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경영진의 글로벌 시야에 제약 당한다.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사업을 구상하고 그에 합당한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창업가가 그에 적합한 시야와 경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벤처캐피탈이 경영진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중소기업 창업지원법상 벤처캐피탈이 51% 이상의 지분과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됐지만, 창업가와 벤처캐피탈 사이의 효과적인 경영 협조는 단지 법규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업 목적에 대한 인식과 문화의 문제다. 벤처캐피탈이 단지 투자기업에 CFO를 파견하거나 투자약정서에 다양한 신규 사업 관련 조항을 부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창업가는 조직의 성과 창출을 위해 보다 열린 마음으로 벤처캐피탈을 경영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CEO의 자리까지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한다.

경영은 창업가의 열정 또는 한정된 능력만으로 성공시킬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 결코 아니다.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은 창업가 에디슨의 고집으로 경영난에 빠진 뒤 JP모건의 자금 수혈을 통해 톰슨휴스톤전기회사에 합병 당했다. 그 뒤 에디슨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회사는 찰스 코핀의 주도 하에 오늘날의 GE로 성장했다.


벤처는 위험을 최소화 한 창조
20세기에 ‘부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Wealth)’가 가능했던 이유는 작업에 대한 분석과 자동화, 상이한 지식을 통합해 최종 성과를 내는 경영 원리가 발전하면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벤처캐피탈의 경영 방식이 도입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 벤처캐피탈 투자의 생산성이 향상됐는지, 또는 벤처캐피탈의 성과 창출의 원리가 발전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흔히 벤처캐피탈 종사자들 가운데 열 개 투자해서 아홉 개가 실패해도 한 개가 성공하면 모든 것을 보상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매우 위험하다. 또한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 셋째도 사람”이라는 식의 격언도 실무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성공의 원인을 대부분 운(運)과 사람에게만 돌린다면, 그 어떤 체계적인 원리를 경영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일반 기업이 추진하는 신사업의 경우 50%를 넘지 않는 성공률은 무의미하다. 하물며 10분의 1의 성공률은 말할 것이 없다. 많은 성공한 혁신 기업들은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다 높은 확률로 성공하기 위해 체계적인 혁신 기법을 도입해 왔다. 고객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개발 방향의 설정, 그리고 마케팅 전략의 체계적 수행을 통해 위험은 분명히 줄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업의 폐기 또는 개선이 수시로 일어나야만 한다.
한편으로는 모험을 뜻하는 단어인 ‘벤처’도 부적절해 보인다. 벤처캐피탈이 아니라 창조 자본, ‘크리에이티브 캐피털(Creative Capital)’이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기업가 정신의 민주화
최근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 수단으로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영국의 조파, 미국의 킥스타터나 인디고고 등이 선구가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크라우드 펀딩 기관이 등장하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은 아직 초기 단계이며 사업 모델도 계속 진화 중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는 영리 사업의 투자 성과는 아직 불투명하며, 문화 예술 사업의 후원 개념으로 이뤄지는 투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이 ‘기업가 정신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Entrepreneurship)’ 추세의 일환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과거 왕이나 군주, 소수의 부호가 독점하던 모험 사업에 대한 투자가, 벤처캐피탈의 등장으로 다수의 중산층이 참여할 수 있는 펀드의 형태로 진화하고, 많은 대중들이 소액으로 참여할 수 있는 크라우드 펀딩이 등장하게 된 것이 이같은 추세를 반영한다.

하지만 크라우드 펀딩의 존재 이유가 단지 자금의 조달 수단에만 그친다면 이 모델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대가 없는 후원을 하는 수단으로 존재한다면 몰라도, 혁신 사업에 대해 경제적 수익률을 기대하는 투자의 통로로서 역할을 하려면, 피투자 기업의 경영 성과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인 경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글 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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