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이것 역시 그냥 지나간다면

머니투데이 박정태 경제칼럼니스트 | 2014.12.20 07:30

투자의 의미를 찾아서 <70>

#유대인들의 경전 ‘미드라시(Midrash)’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다윗왕이 보석세공인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반지 하나를 만들되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고,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내게 기운을 북돋워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고 했다. 보석세공인은 도저히 그런 글귀가 생각나지 않자 솔로몬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지혜로운 왕자는 이렇게 답해주었다. "반지에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라고 새겨 넣으시오. 왕이 승리감에 도취해 자만할 때, 혹은 패배해서 낙심했을 때 그 글귀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을 겁니다."

‘항공기 리턴’ 사건으로 검찰 조사까지 받은 재벌 3세와 그가 주인 행세를 했던 기업의 임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말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 이것 역시 또 지나갈 거야. 늘 그래왔으니까. 여론의 관심은 금방 식어버리고 그러면 뉴스에서도 사라지고 대중은 곧 잊어버릴 테니까.

#맞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대중은 특히 그렇다. 불과 몇 해 전 벌어졌던 재벌 기업의 비자금 사건이나 불법 로비 파문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연일 주요 신문의 1면 톱뉴스를 장식했고, 매일같이 수사 받는 재벌 기업 임직원들의 모습이 방송에 비쳐졌으며, 국민 모두가 사건의 추이를 예의주시했다. 비판 여론이 들끓자 국회에서도 여야 모두 재벌기업의 비자금 문제를 공격했고 급기야 특검제까지 도입돼 해를 넘겨가며 수사했지만 결국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비등했던 비판 여론이 먼저 가라앉았다.

그리고 뉴스 비중도 점점 떨어졌다. 아무리 충격적인 대형 사건도 언론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대중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당사자 격인 해당 기업에서 이를 모를 리 없다. 결국 비판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버티면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수사에 적극 협조한다고 하면서 사건과 관련된핵심 임직원을 해외로 도피시키며 시간을 번다. 필요할 때는 사과 성명도 발표하지만 진정성은 별로 없다.

#재벌 비리와 관련된 사건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끝난다. 재벌 총수가 구속되거나 재판에 넘겨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들어, 심지어는 올림픽 유치에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면을 받는다. 그렇게 풀려나고 나면 너무도 당당하게 다시 재벌 총수로 활동하고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불법 행위는 그대로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땅콩’ 한 봉지가 야기한 사건이 이처럼 커지게 된 것은 쌓이고 쌓인 국민들의 반(反) 재벌 정서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벌가사람들은 가끔씩 보통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곤 하는데, 2년 전 벌어졌던 재벌가 자녀들의 외국인 학교 부정 입학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문제가 됐던 재벌가 며느리들은 자기 아이를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돈만 주면 브로커를 통해 손쉽게 취득할 수 있는 캄보디아와 에콰도르의 영주권까지 얻기도 했다.

#이번에 ‘항공기 리턴’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가자 해당 기업의 초기 대응이 너무 안이했고 여론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재벌을 향한 분노가 갑자기 폭발하면 어떤 기업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당사자 입장에서는 ‘운이 없어서’ 자신만 된서리를 맞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래서 이번 일이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그러니까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건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벌어졌겠는가? 굳이 문제가 된 재벌 기업이 아니더라도 오너 총수와 그 가족의 전횡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부도덕한 기업인은 비난을 받아야 하고 범죄를 저지른 기업인은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재벌 총수라 해도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다 지나간 것 같지만 사실 잊혀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반지에 새겨진 글귀,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는 다윗왕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실은 우리 보통사람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경구(警句)다. 그냥 지나가면 언제든 또다시 되풀이될 것이다. 풍차는 사라져도 바람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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