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라고 하기엔 이상하다. 표지는 화려한 칼라색도 아니고 사람이든 풍경이든 당연히 있어야할 '표지 모델'이 없다. 대신 표지는 두꺼운 양장 옷을 입었다. 그러니 책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더군다나 창간호에 딱 한 인물(배우자 등 관련 인물들은 나온다)을 다루니 영락없는 '평전 단행본'이다. 결정적으로 광고가 없다.
'한 호에 한 인물을 다루는 광고 없는 양장 잡지'. 처음이란다, 우리 출판계에서.
두꺼운 암갈색 표지에 덩그러니 박힌 제목은 'biography(바이오그래피 : 전기)'다. 평전물은 지루하다. 웬만큼 '글발'이 좋지 않으면, '평전'이란 틀에 갇히는 순간 재미는 사라지고 '미화'에 대한 선입견이 커진다.
"사람의 삶은 잡지처럼 계통 없이 흐르니 평전은 잡지가 맞다"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편집팀의 철학이 우선 형식 파괴로 이어진듯한데, 잡지도 안 읽히는 세상에서 인물평전 잡지가 과연 읽힐까.
#누구-이어령 창간호 첫 인물은 이어령(80) 전 문화부 장관이다. 인물의 무게와 그가 풀어온 '스토리'만 보면 '내용' 채우는 거야 문제없겠다 싶지만, 쉽지 않은 인물이다. 한 일도 많고 존경만큼이나 비판도 많이 받지 않던가. 그러나 편집팀의 이유는 좀 색다르다.
"그는 과거를 얘기해주는 어른이 아니라 미래를 이끌기를 자처하는 어른이다."
인터뷰를 맡은 이연대 편집장이 이어령의 서재를 찾았을 때 그는 아이패드로 전자책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읽은 책은 플라톤 전집. 디지털 장비 아이북스 가상 책장에는 도스토옙스키 전집과 일리아드, 오디세이, 손자병법과 같은 고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존 킨들엔 '파우스트'와 최신 이론서들.
이 편집장은 그가 "7마리의 '고양이(CAT)'를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CAT는 'Computer Aided Thinking'의 앞 자. 컴퓨터 7대가 있다는 말이다. 아이패드와 킨들을 합하면 디지털 기기는 10대가 넘는다. 그의 모든 기기는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연결돼 '말 잘 듣는' 7마리 고양이가 된다.
2006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한 '디지로그'를 가장 먼저 선창한 이어령의 집필 방식은 연필 작문을 고집하는 작가들로선 이해 안될 수도 있겠다. 메모는 아이패드. 필기 인식 기능을 갖춘 'Notability'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손끝으로 글을 쓰고 테스트로 변환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텍스트는 클라우드 서비스인 드롭박스에 자동 저장된다. 본격적인 작업은 에코 전자펜으로 이뤄진다.
이어령은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팔십 먹은 노인네가 디지로그를 하는데 요즘 젊은 아이들은 댓글이나 달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물론 편집팀은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한다. '현실에 눈 감은 지식인'이라는 이어령에 대한 비판이 틀렸다는 것.
대표적인 사례로 1967년 소설가 남정현이 필화 사건으로 법정에 섰을 때 그를 변호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당시 '현실 참여'를 외치며 이어령을 비판한 문인들이 아닌 바로 이어령이었음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어령은 법정에서 "남정현의 소설 분지가 북괴에 동조한 것 아니냐"는 변호사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작가는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 보는 격이다. 장미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지 사람에게 담배 파이프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정현의 분지는 창작과정의 꽃이다. 그가 만일 다른 의도로 썼다면 상징적, 우화적 수법이 아니라 준거가 확실한 리얼리즘 기법으로 썼을 것이다."
편집팀은 이어령을 읽을 것을 '권한다'. "이 선생의 말은 '앞으로', '필요', '가능성'과 같은 단어를 자주 포함했다. 우리 모두 동일한 시간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이 선생의 시간은 우리 것과 다르게 보였다."
잡지의 말미를 장식한 부인 강인숙 선생의 인터뷰는 '뻔한' 레퍼토리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조력자로서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만이 아닌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낸 또 하나의 '인물'임이 드러나 있다.
평론가부터 언론인, 교수, 장관을 지내며 '여러 우물'을 판 그의 우물을 들여다보았으며, 중국 지성 린위탕과 비교했다. 그리고 '맹수' 이어령의 문학논쟁을 되짚고, 3만권의 장서와 디지털기기로 가득 찬 그의 서재 사진도 있다. 인터뷰 장소다.
"나는 우물을 파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깊은 우물을 하나 파고 싶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우물에서 나오는 물로 갈증을 풀 수 있게 해 주고 싶다.(유쾌한 창조 中)"
이어령은 이런 자신에 대해, 그런 힘에 대해 '호기심'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원천은 바로 '미래'다. "나는 자꾸 지나온 시간을 물었고 그는 매번 다가올 일로 답했다"고 말하는 이 편집장은 "이것이야말로 이어령을 읽어야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들은 왜 바이오그래피를 만들었나 바이오그래피는 격월간으로 발간된다. 2번째 인물은 정치인 김부겸으로 확정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인물은 문화예술인이거나 기업인이다. 살짝 들어보니 '알 만함을 넘어 거물급'이다(비즈니스상 오프더 레코드를 지켜준다.)
이 편집장은 '고정관념'을 깨고 '사람의 뒷모습'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잡스에 대한 스토리를 들으며 놀랐고 존경하게 됐죠. 그런데 막상 900페이지에 달하는 평전을 읽고 너무 실망했습니다. 그 삶을 그렇게 재미없게 풀어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 졸업 후 국회의원 보좌관만 하던 이 편집장은 잡스 평전을 계기로 관심 있었던 출판, 잡지 쪽으로 업을 바꿨다.
그럼에도 한 사람을 조명한다는 건, 특히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평전'이라는 특성상 미화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두 번째 대상자인 김부겸 전 의원은 정서적으로 '가까웠던' 정치인 아닌가.
"그는 '호남정당에서 활동하는 영남인'으로 다양한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철새 정치인'이란 비아냥거림이 있는 것도 압니다. 그는 실제 선거 4번을 출마하며 모두 다른 당 이름으로 나왔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인간 김부겸'을 다룰 것입니다."
광고가 없기 때문에 순전히 사서 읽어야만 바이오그래피는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하하 그러게요. 많이 봐주셔야할 텐데. 그래도 접촉하는 인터뷰 대상자들이 신문이나 기존 잡지와 다른 풀 스토리에 관심을 보여서 긍정적입니다.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바이오그라피 매거진=스리체어스 편집부, 격주간, 142쪽, 1만5000원.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