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내대표' 내려놓는 박영선, '고난의 147일'

머니투데이 이현수 기자 | 2014.10.02 11:17

[the300] "소신도, 체면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걸어온 힘든 시간이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1일 오후 경기 안산 세월호유가족 대책위 사무실을 찾아 세월호 유가족들의 특별법 합의안 수용을 설득하기 위한 면담을 마친 뒤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스1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2일 직에서 물러났다. 지난 5월8일 '당당한 야당'을 전면에 내걸고 선출된 지 147일만이다.

박 의원은 이날 오전 사퇴의 변에서 "작은 매듭이라도 짓고 떠나는 것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가 간신히 매듭지은 세월호특별법 여야 3차 협상안마저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지못해 원내대표직은 '상처뿐인 영광'이 됐다.

돌이켜보면, 그를 원내대표 자리에 올려놨던 '야당성'과 '무 계파'는 세월호정국에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대여 강경노선을 주장한 당내 초·재선 의원들과,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를 중심으로 한 신주류의 지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모두 허물어졌다.

우선 야당성. 박 의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두 번의 세월호특별법 합의안이 당내 반발로 무산되면서부터다.

그는 8월7일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세월호특별법 합의를 이뤘지만 유가족 반대에 부딪혔다. 19일 2차 합의안을 발표했지만 또다시 유가족과 당내 반발로 무산되면서 힘이 급격히 빠졌다. 그를 지지했던 당내 초·재선 의원들은 의원총회에서 박 의원이 대여 투쟁력을 보이지 못하고, 서둘러 합의를 이뤘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더 근본적으로 박 의원은 무계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새정치연합은 '세월호 이슈를 등에 업고도' 6·4지방선거와 7·30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졌다. 당이 공천파동에 휩싸이면서 박 의원을 지지했던 김한길 안철수 당 대표가 자리에서 물러났고, 박 의원은 원내에 이어 비상대책위원회까지 총괄하는 자충수를 뒀다.


9월 초 박 의원이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를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하려는 시도는 친노 강경파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입 과정에서 문재인 의원이 깊숙히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교수 영입설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문 의원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박영선 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

탈당까지 고민, 나흘간의 칩거 끝에 국회로 돌아온 박 의원은 "지금부터는 저에게 주어진 책임감만을 짊어지고 가겠다"며 세월호특별법 합의 이후 물러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후 3차협상에선 전면에 나서지 못했고, 무엇하나 뚜렷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극도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박 의원이 무 계파인데다, 당내 친분관계도 두텁지 않다는 점에서 일각에선 '박영선 왕따설'이 돌기도 했다. 그가 세월호특별법 2차 협상에 앞서 공개적으로 당의 중진의원, 원내부대표단, 3선의원, 상임위 간사단 릴레이회동을 벌인 것을 두고선 "당내 친분이 없어 그런 방식을 택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초·재선 시절 당의 결정마다 어깃장을 놓더니, 본인이 그대로 되받는 것"이라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왔다.

박 의원은 이날 사퇴 변에서 "책임이란 단어에 묶여 소신도, 체면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걸어온 힘든 시간이었다"며 "제가 폭풍의 언덕에서 힘들어 할 때 격려해주신 동료의원들, 힘내라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경남 창녕 출신으로 3선인 그는 MBC 기자를 거쳐 2004년 제17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정치에 입문했다. 18대·19대 총선 때 서울 구로을에서 당선됐다. 당 대변인, 정책위의장, 최고위원 등을 거쳤고,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첫 여성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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