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원' 없어 창피당했던 섬마을 소년, 회장님 되더니…

머니투데이 신아름 기자 | 2014.08.29 08:00

[당당한 부자]<2-1>김의복 단건축사사무소 회장

김의복 단건축사사무소 회장/사진=이기범 기자
1960년대 후반 인천 영흥도의 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어린 소년은 끝내 돈 5원을 학교에 갖고 오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이 저축운동을 한다며 반 아이들 모두에게 5원씩을 챙겨오라고 했던 날이었다. 당시 5원이면 팥이 들어있지 않은 '아이스께끼' 하나를 사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돈을 가져가지 못한 소년은 결국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들었다. 하지만 소년을 진짜 아프게 한 것은 '우리집엔 돈이 없다'던 어머니의 쓸쓸한 말 한 마디였다.

김의복(57) 단건축사사무소 회장에게 어린 시절은 가난했던 기억으로 점철돼있다. 오늘날 연 매출 130억원대를 올리는, 인천지역에서 내로라하는 건축설계·감리업체를 이끄는 회장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면서도 그가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것은 이런 유년시절에 대한 아련한 아픔과 향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돈을 안주셨습니다, 아마 못주셨던 거겠죠. 그 때였던 것 같습니다. '아, 돈을 많이 벌어야겠구나' 하고 제대로 결심한 순간 말이죠."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장남이었던 김 회장에게 '양보'는 어려서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그에겐 형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황해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피난오던 길에 형이 죽었고, 그는 졸지에 밑으로 동생 넷을 둔 장남이 됐다. 김 회장은 커가면서 모든 걸 동생들에게 양보했다. 워낙 퍼주기를 좋아했던 성격이라 큰 불만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처럼 이뤄졌던 이런 나눔은 자연스레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힘이 돼줄 수 있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남을 도우면 나도 행복해집니다. 이런 좋은 일을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누구는 '오지랖이 넓다'고 했고, 누구는 '돈 자랑하지 말라'고도 했다. 처음엔 이런 말들이 비수가 돼 가슴을 찔렀지만 이젠 개의치 않는다.

"나눔이란 여유있는 사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퍼줄 사람 있을까요. 어려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더 열심히 기부하고 나눔활동에 앞장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가진 걸 계속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려 합니다."

◇유명 야구선수의 '키다리아저씨'가 되다

김의복 회장/사진=이기범 기자
김 회장이 나눔활동에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은 한 야구선수를 후원하면서부터다. 회사를 창업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이 됐고, 김 회장도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평소 야구를 좋아했던 그는 시간을 쪼개 취미로 야구 '직관'(직접 관람)을 다녔다. 특히 자신이 응원하는 홈팀(인천) 경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직관 사수를 했다.

그렇게 경기장에 출석도장을 찍던 김 회장은 우연한 기회로 왕년의 유명 야구감독 하나를 알게 된다. 그는 당시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연이은 사업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김 회장은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들이자 장래가 촉망되던 야구선수 A를 후원키로 한 것이다. 실력 있는 야구 꿈나무가 돈 때문에 야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게 발동했다고 한다.

"순수하게 야구팬으로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A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거든요. 꽤 오랜기간 A를 후원했는데 나눔활동에 대한 저만의 가치관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어요. 후원을 하면서 저도 한층 더 성장하게 된 것이죠. 나눔은 일회성이 아니라 습관화, 생활화가 돼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김 회장의 나눔인생은 지금까지도 그칠 줄 모른다. 돈이 없어 대학 진학 대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각 대학에 수시로 후원금을 내고 있다. 건강이 악화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며 독거노인들에게 꾸준히 식판 봉사활동도 펼치고 있다. 최근, 그런 그에게 더 큰 목표가 하나 생겼다. 바로 나눔재단을 만드는 일이다.

◇가난했지만 추억이 있던 곳…"나눔 위한 공간으로 쓰고 싶다"


꾸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영흥도의 '꾸지나무농원'. 허름한 옷차림에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쓴 중년 남성 하나가 꾸지나무들 사이로 쉴새없이 움직인다. 그는 나뭇잎들을 찬찬히 살피고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바로 김 회장이다.

"남들은 이제 좀 편히 쉬어도 되지 않냐고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병이 나는 스타일이에요. 젊어서는 돈을 많이 버는 데에만 열중했지만 나이가 들어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볼 줄 알게 되니 내가 나고 자란 땅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꾸지나무농원을 가꾸게 된 이유죠."

꾸지나무농원은 영흥면사무소 맞은 편에 위치한 김 회장 소유의 아담한 농원이다. 약 15년전 김 회장은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집 터가 있던 이곳 땅을 매입해 꾸지나무를 심고 정성껏 가꿨다. 꾸지나무는 이 지역에서 자생하던 뽕나무과 나무로 김 회장의 유년기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김 회장은 꾸지나무농원을 재단화해 보다 체계적인 나눔활동을 위한 기반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해왔던 나눔활동을 자신의 모태가 있던 곳, 꾸지나무농원을 통해 정례화하고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꾸지나무농원을 회사 직원들의 쉼터나 개인적인 휴양의 용도로 사용해왔어요. 근데 보다 유익하게 활용할 방안이 없나 고민한 끝에 나눔활동을 위한 재단부지로 활용키로 결심했습니다."

김 회장은 꾸지나무농원 내에 숙박시설, 연수원 등 부대시설을 지어 수익모델을 만들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 일부를 기부 등의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큰 틀의 계획도 세워놨다. 현재 농원 내 부대시설 건축을 위한 허가를 받은 상황으로 내년 6월 완공을 목표로 조만간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우리 사회에 올바른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렇듯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왼손이 한 일은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패러다임에 갇혀 남 몰래 하는 선행만이 진짜 가치있는 것으로 규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런 점은 우리나라 기부활동이 일정 규모이상으로 커지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이 아닌 어느 작은 회사의 경영자가 외부에 알리지 않고 기부를 했다고 하면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게 우리사회 현실이에요. '저 놈이 대체 무슨 돈이 있어 기부를 하지?' 하는 의심이죠. 사실 저도 그런 악의적인 말들을 그동안 많이 들어왔어요. 남이 기부하면 잘했다고 칭찬해줄 수 있는 성숙된 국민 의식이 절실합니다."

김 회장이 올 초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건 이런 이유가 컸다고 한다.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서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기부를 해야 주위의 시기 어린 말들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아서였다. 또 올바른 기부문화 정을 위해 솔선수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운영하는 고액 기부자클럽으로, 1억원 이상을 기부하면 개인회원으로 가입된다. 현재 아너 소사이어티의 가입자 수는 전국적으로 562에 달한다.

"나는 계속해서 기부하고, 나눔활동을 펼쳐나갈 생각이에요. 대신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하려고 합니다. 시기와 질투 어린 말들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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