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정절로 정치한 남자들…가문 위해 억압당한 욕망"

머니투데이 대담=신혜선 문화부 부장 | 2014.08.23 05:49

[저자를 만났습니다]'조선 여성정절 이데올로기'를 논하다…'정절의 역사' 이숙인 vs '화냥년' 유하령

역사소설 '화냥년'의 저자 유하령 작가(왼)와 역사서 '정절의 역사' 저자 이숙인 박사
고려시대 만해도 여성의 재혼은 흔한 일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때는 '(남편이 죽은 지) 3년 상 안에 결혼 안하면 상을 준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조선은 어떤가. 재가를 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도 모자라 죽은 남편을 따라 스스로 '자결'하고 '열녀문'을 세워야 집안이 흥하는 공식이 성립된다. '은장도'가 혼수 필수품이 된 이유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란 참으로 잔인한 '미망인'이란 단어는 21세기 지금도 고매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여성의 재혼은 물론 삼가, 사가도 많았다(태종 육전). 조선시대 여성의 재혼이 사실상 금지된 것은 성종 경국대전에 개가규제금지에 관한 법이 명문화되면서다. 이도 직접 여성의 개가를 금한 게 아니다. '개가녀의 자손은 관직 진출을 못한다'는 식으로 슬쩍 돌렸다. 이른바 '개가녀자손금고법'. 여기서 자손(子孫)이란 단어의 해석을 두고 분분했다. 즉, '자식과 손자'까지 관직진출을 금할 것이냐, 아니면 '자손대대'로 금지할 것이냐다.

'정절의 역사'를 쓴 동양철학자 이숙인 박사는 "3대도 아니고 자자손손 영원히 족쇄를 채우자니 이건 현대식 연좌제보다 더 심한 거"라며 양반들의 '잔인성'과 '위선'을 꼬집었다. 역사소설 '화냥년'의 저자 유하령 작가는 "정말 밥 먹고 할 일 없던 사대부들"이라고 잘라 말한다.

조선시대는 왜 국가가 나서 이토록 여성의 정절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했을까. 두 저자는 이를 권력분배 경쟁과 상속(서자 배제와도 일맥상통한다) 등 정치, 경제적 문제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역사 전문출판사인 '푸른역사'에서 6개여월 시차를 두고 출간한 소설 '화냥년'과 역사서 '정절의 역사'는 조선시대 왜곡된 여성의 정절을 다뤘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한다.

- 역사서 '정절의 역사'를 보면 "조선시대 정절은 사적인 영역의 성적 개념에 '여성의 사회적 의무'가 포함되는 형태로 계속 강화된다"고 기술한다. 소설 '화냥년'에서는 이런 요구가 전쟁포로로 돌아온(속환, 贖還) 여인들에 대한 잔인한 대우로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 이숙인(이하 이)= 조선에서 정절은 부부간 상호의무적인 개념이 아닌 아내의 일방적 의무 개념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그 개념은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과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효과 같은 맥락에서 제기된 '하위자의 의무'가 돼버린다. 정절이 삼강의 질서로 편입되는 순간, 정절은 개인이나 부부관계의 영역이 아닌 사회와 국가의 이념과 결부된 '공공'의 것이 된다. 정절을 해친 아내에 국가가 분노하고 법으로 응징하는 식이다.

논리적으로 여자의 정절은 남자의 충절과 쌍을 이룬다고 하지만 남자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충절의 의무보다 여자들의 정절을 관리하고 간섭하는 데 과도하게 에너지를 쓴 셈이다. 연구를 하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라.

여성들의 정절 관리를 남자들의 충절을 담보한 것으로 쓰고, 또 국가가 그것을 관리하다니 말이 되는가. 송시열이 "여자들을 개가 못하게 하는 제도는 너무 심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반대세력들은 이 발언을 물고 늘어졌다. 비판자들은 "송시열이 여자의 정절을 부정한 것이고, 이는 충절을 부정하는 것이니 조정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사람'이다"라는 논리를 폈다('정절의 역사' 4부 정절의 사건과 논쟁).

▶유하령(이하 유)=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이 조선을 만들 때 주자성리학을 가져왔다. 주자성리학 명분론, 의리론의 출발이 여자는 정절, 남자는 충으로 구체화됐다. 그런데 왕은 사대부에게 충을 요구하고, 사대부는 다시 여자에게 정절을 요구하는 식으로 바뀌어 여자의 정절이 사대부를 통해 충절을 대표하게 된다. 정절이 충을 대신하는 게 맞는가?

'화냥년'의 개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화냥'은 성종 때 '유녀'(몸 파는 여자)를 단속하면서 성종실록에 화냥(花娘)이라고 쓰인 것이 나온다. '화냥'은 명나라에서 건너온 중국어다.

임진왜란 때 명군 10만명이 8년3개월을 조선에 참전했다. 철군 이후 조정에서는 명군과 혼인관계를 유지한 여자들을 포함해서 명군과 관계한 여자들을 모두 한성부 10리 바깥으로 내쫓는다. 이때부터 정절 관념에서 어긋난 여자들을 모두 화냥년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본다.(조선남자를 지아비로 맞아들이지 않은 여자들 또한 화냥년으로 간주됐다.)

40년 이후 병자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간 여자들,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도 화냥년이라 불렸다. 사료에는 백성 30만~50만명이 끌려간 걸로 나와 있는데 국가가 '속환사'를 보내 데려온 포로는 600명에 그쳤다. 전쟁의 희생자 여자는 '화냥년'으로 취급됐고, 국가는 포로송환(공속)에도 적극 나서지 않았다.

▶이=장유의 사례를 보자. 그는 인조 임금에게 청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를 아들과 이혼하게 해달라고 소를 올렸다(당시 사대부 이혼은 왕이 허락해야 했다). 인조는 수많은 속환녀를 생각해 선례를 남길 수 없다며 불허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장유의 부인이 남편의 유지라며 다시 소를 올렸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는 장유 부부의 딸이었다. 효종은 장인의 유지라는 명분에 굴복, 장유의 아들에게만 특별히 이혼을 허락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많은 속환녀가 이혼을 당했다.

그 후 30년이 지나 장유의 손자 장훤이 관리 임용에서 거부됐다는 점을 봐야 한다. '불결한' 환향녀의 아들이라는 이유였다. 장훤은 그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태어났다. 이런 논란을 우려해 계모를 통해 외가 쪽 혈통도 '세탁'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피가 더럽다"고 관직 진출을 못하게 한 것이다.

▶유=오죽하면 '회절강'이 등장했겠나. '화냥년'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속환녀들이 버림받고 자결을 요구받자 인조는 고을마다 강을 지정해 몸을 씻게 했다. 잃은 정절을 다시 되돌린다? 회절강에서 몸을 씻었다고 해도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인조반정 공신인 김류의 사례를 보자. 그는 강화도에서 붙잡힌 자기 딸들을 빨리 빼내겠다고 청군이 달라는 대로 은전을 줘서 속환가를 높여놓았다. 그런데 그 아들인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은 청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도망갔다. 그러자 손자 김진표는 할머니와 어머니, 자기 부인에게 칼을 주며 자결을 강요했다. 사대부의 '모럴해저드'가 아니고 무엇인가.

- 공공의 안녕, 통치에 여성성에 대한 통제가 왜 그리 중요했나.

▶유=당시 상속관행이나 경제력을 함께 봐야 한다. 정절의 관념과 경제의 관념이 맞물려 있다는 의미다. 고려시대만 해도 딸도 상속받았다. 조선 인조반정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여자들은 상속 대상에서 제외됐다. 서인이 만년 집권당이 되면서 균분상속에서 '적장자 단독상속'으로 바뀌었다. 성종까지 있던 수신전(守信田, 과부에게 주는 땅)도 후기 들어 없어졌다. 그럼에도 사대부들이 경제력을 박탈한 며느리의 정절과 시집간 딸의 정절을 발판으로 더 높은 권력을 보장받았다니 웃긴 일이다.

▶이=사회의 질서개념에 욕망문제는 중요하다. 어떤 방식으로 규제하고 통제, 관리할 것인가. 문제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차별적 관리다. 남자는 첩에 기생에 누릴 거 다 누렸다.

조선 산업구조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점 땅이 없어진다. 부모 입장에선 (상속을 위해) 선별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여자는 출가외인이 되고 살아서 볼 수 없는 여자 자식에게는 줄 땅도 없게 된다. 중국보다 조선이 여자의 정절에 더욱 엄격했던 것은 같은 이론이라 해도 제국과 식민지국가라는 조건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애초 정절은 성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중국에선 오히려 몸의 정조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로 해석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남기고 남편이 죽었다. 굶어죽을 상황에서 적군에게 시집가서 아이를 길렀다면? 꿈에 남편이 시부모랑 남편이 차례로 나와 너 '정절이 뭐가 중요하냐, 그렇게 자손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설정'이 있다. 여성의 에너지를 다시 활용하는 거다.

▶유=최근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란 곳을 다녀왔다. 일본이 네덜란드와 교역하던 곳인데 일본 사람들도 여성에 대한 의식이 비슷했다지만 데지마 안에는 '게이샤'가 들어갈 수 있었다. 게이샤를 통해 성관리를 한 셈이다. 조선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왜관에 여성은 못 들어가게 했다. 때문에 왜관 바깥에서 간통사건 등이 많았다. 사건이 발각되면 조선 여자들만 다 죽었다. 데지마나 왜관 모두 '경제적 이유'에서 여성들이 외국인을 상대한 거였다. 국가가 성욕을 관리한다 해도 융통성조차 없었던 거다.

- 정절, 이 단어를 지금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이=정절을 그대로 쓰면 짜증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자의 삶과 생각을 너무 오염시켜 놓았기에. 그렇다고 그 용어를 폐기처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도 든다. 폐기돼도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정절에 상응하는 새로운 용어가 나오지 않을까. 용어의 폐기보다 그 역사적 문맥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게 우선이다.

남녀불평등한 시대의 정절의 현 실태를 성찰하면서 상호성을 생명으로 한 '정절의 이상형'을 남녀평등의 자원으로 재활용할 수는 없을까. 흔히 참한 여자를 보고 "조선시대 양반집 규수 같다"고 하는데 이런 이미지는 잘못된 거다. 역사 속의 여자는 무척 다양하다. 여성담론이지만 각 사상적 측면을 보면 좋겠다.

▶유=소설 '화냥년'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조선여자 포로들은 만주벌판에 포로들의 마을을 만들고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간다. 조선 사신들은 마을을 지나가며 "화냥년과 화냥년의 새끼들"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비록 소설의 서사지만 자식을 버리지 않고 마을을 만들어 꿋꿋이 키워내는 '화냥년'들이 정절을 지키지 않은 것인지 묻고 싶었다.

심양 사회는 조선이 아닌 청의 사회였다. 조선과는 이념이 달랐고 그들에게 정절의식은 없다. 속환 후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아님 돌아오지 못하거나 심양에서 포로로 붙잡혔던 이들의 박탈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특히 여자들은 종으로 애도 낳을 것이고 '디아포라스' 이상의 고통을 겪었다.

화냥년의 얘기는 아픈 역사지만 오늘을 사는 여성들이 인생의 주체로서 살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바가 있다. 각설하고 정절은 없어져야 할 단어다. 수절? 행실? 모두 다. 정절은 주체적인 관계 속에서, 공동체 정신 속에서 도리의 신의 문제로 봐야 한다.


◇ 이숙인 vs 유하령, "가문을 위해 자결? '오염된 단어' 정절, 폐기처분하라!"

'정절의 역사'를 읽다보면 당시 권력을 잡고 나라를 쥐락펴락한 사대부들이 아녀자들의 행실과 '소문'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는 아주 '한심한' 역사적 사료들을 마주하게 된다.

'어느 가문 며느리의 행실'에 관한 소문을 물고 늘어져 반대파를 공격했으니, 여성(성)이 권력 유지의 '도구'로 사용됐던 것만은 분명하다.

배우자 간의 기본 예의와 상호 의무쯤으로 해석되고 존중돼야 할 정절의 개념이 한 나라의 통치수단인 '국법'으로 사용된 역사. 대한민국 여성성에 대한 가치관이 충분히 왜곡될 수 있는 뿌리를 안고 있다고 봐야 할까.

저자 이숙인 박사(동양철학)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조선시대 여성사상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다.'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선비의 멋, 규방의 맛' 등을 저술하고 '열녀전', '여사서' 등을 번역했다.

이 박사의 개인적인 최종 목표는 '조선여성사상사' 집필이다. 전통과 관련해서 여성 문제의 통시성과 구체성을 잘 구현해낼 수 있는 주제를 항상 고민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정절'은 제일 먼저 짚고 가야할 주제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이 박사는 "정절을 지키는 것이 정절을 포기하는 것보다 물질과 가치의 측면에서 더 이익이 됐다는 분석도 가능하다"며 "정절을 선택한 여성들의 다양한 계기와 양식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집필했다"고 말했다.

소설 '화냥년'은 병자호란의 비극 속에 여성들이 어떻게 소외받고 상처 입었는지를 그린 내용이다. '정절의 역사'가 조선시대 여성의 정절이 어떤 통치수단으로 활용됐는가를 사료를 통해 조명한 역사서라면 '화냥년'은 소설적 서사를 통해 비극적 사실로 묘사한 셈이다.

양반들은 큰 돈을 주고 기껏 속환(당시 명은 돈을 주고 포로를 찾아가도록 했다)했지만, 며느리나 딸의 경우 동네 창피하다고 숨어살게 하거나 심지어 자결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전쟁 앞에서 "사대부는 상소만 쓰고 백성만 고통 앞에 내몬" 형국인데, 특히 전쟁과 만난 '정절 이데올로기' 앞에서 여성의 고통은 남자의 몇 곱절일 수밖에 없다.

유 작가는 "역사소설은 대중소설이어서 문학성보다는 역사적 사실 위에 소설적 서사를 잘 입혀야 한다"며 "특히 소설 ‘화냥년’은 역사사회소설로 썼기 때문에 사료(사실)에 입각해서 실재보다 더 리얼하게 만드는 데에 정성을 들였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남편의 도움도 있었다. 남편 한명기 교수는 비슷한 시기 출간한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 병자호란을 집필하면서 동일한 소재를 여성문제의 시각으로 역사소설로 써보면 어떻겠냐고 권한 게 시작이었다. 심양에 글려간 포로들을 소재로 9개월을 팠다는 설명이다.

유 작가는 중어중문학을 전공했다. 월간 '샘이깊은 물' 기자로 출발, 다큐멘터리 제작자(여성영화제 초대작 '그래, 우린 행복하다' 제작)로 변신한 후 현재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유선주 글쓰기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아시아통섭포럼 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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