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의 증권반세기] 지친 심신 돌려세운 정부 '시그널'

머니투데이 강성진  | 2014.06.27 11:03

[나의 일 나의 인생]<13>8.3조치와 새 출발

편집자주 |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1972년 11월 새로운 각오로 삼보증권 사무실을 유네스코 회관 건물로 확장 이전했다. 그 무렵 창 밖을 바라보며 사업 구상을 하고 있는 필자.

◇외부개입 통해 해결한 '증금주 파동'..정부 강제 사태 수습에 회의감
증금주 파동은 1970년대 들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어진 시장의 대혼란이었다. 60년대와는 달리 70년대 이후에는 증금주 파동을 끝으로 더 이상 책동전이나 증권 파동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제도적으로 한층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증금주를 둘러싼 공방전이 결국 증권 파동으로 이어지자 정부와 거래소는서둘러 수습에 착수했다. 김용갑 증권거래소 이사장은 매수 측 증권회사와 매도 측인 금성증권 간의 합의를 중재했는데, 사실 매수 측은 실물을 확보한 상태여서 굽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굴복해야 할 쪽은 매도 측이었다.

그 무렵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증권시장 개혁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증금주 파동을 정리하지 않으면 시장 개혁 자체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부에서는 증금주 공방전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971년 6월 3일 투기거래 근절을 위한 행정명령을 내렸는데, 매매시장을 1부와 2부 시장으로 나눠 집단 매매체결 방식을 새로 도입하고, 대차거래를 폐지해 명실상부한 신용거래 중심의 보통거래 제도를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의 6.3 조치가 발표되자 매수 측에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에서 가처분 결정을 내리자 정부는 증권거래법 시행령(7월 29일)과 시행규칙(8월 3일)을 개정해 71년 12월 1일부터 새로운 증권거래 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법규 정비까지 마쳤는데, 증권 파동이 조기에 수습되지 않을 것 같자 정부는 마침내 강제력까지 동원하게 된 것이다.

◇증금주 공방전 장내 정리매매 형식으로 막 내려..두세달 출근 안하고 지방 여행
1973년 1월 4일 증권시장 개장식에서 격탁을 치고 있는 남덕우 재무부 장관.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증금주 파동은 결국 시장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 기관이 개입해 해결하게 됐다. 내가 아무리 정당한 주식 거래를 했다 해도 공권력 앞에서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했다. 나는당시 서슬 퍼렇던 외부 기관에 불려가 밤새 증권 파동의 해결 방안을 내놓아야 했다. 거래소 이사장도 집으로 증권회사 사장들을 하나씩 불러 강제 해옥(解玉, 거래소가 가격을 정해 매매 쌍방으로 하여금 그 가격으로 결제하도록 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했다. 그렇게 해서 8월 16일 타의에 의한 이면 합의가 이뤄졌다. 79만2700주에 달하는 증금주건옥(建玉, 미결제 거래수량)을 주당 1120원에 모두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2년 가까이 끌어왔던 증금주 공방전은 장내 정리매매 형식으로 막을 내렸다. 끝까지 매도 공세를 폈던 금성증권은 증권업 허가가 취소돼 문을 닫는 상황을 맞았지만 매수 측이 입은 손실도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4자 연합이다 보니손실 분담을 놓고 약간의 잡음이 뒤따랐고, 나상근 씨가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나를 꽤나 괴롭혔다. 형사 고발 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이 내려지자,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 이것도 근 10년을 끌다 결국 내가 승소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상처는 나 자신의 의욕 상실이었다. 증권시장 정상화를 원하는 정부의 의도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외부 기관까지 동원해 강제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작은 이익을 앞에 두고는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상대를 바라보면서는 정말 모든 게 싫어질 정도였다.

나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두세 달 동안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고 지방 여행을 다니면서 겨우 마음을 달랬다. 증권업계와의 인연을 끊을 생각까지 하고서 포항제철의 협력회사인 포항축로를 인수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포항축로는 과거 동아건설에서 함께 일했던 이창익 씨가 소개한 회사였는데, 일본의 야마사키구미(山崎組)와 합작해 제철소의 용광로 내부에 특수 내화벽돌을 축조하는 일을 했다. 나는 포항축로를 인수한 뒤 전국에 산재해 있는 내로라하는 축로공들을 불러모으고 일본에 기술 연수도 보내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경영했다. 덕분에 경영성과도매우 좋은 편이었는데, 훗날 삼보증권을 정리할 때 포항제철의 계열사로 들어갔다.

증금주 파동의 여파로 쉬고 있을 무렵 삼보증권 감사를 맡고 있던 동생 강성대와 이득주 상무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나에게 용기를 내서 다시 회사에 나와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내 뒤에는 삼보증권의 임직원이 있고 또 수많은 고객들이 있으니 꼭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사실 내가 삼보증권을 처음 인수했을 때는 우리나라 제일의 증권회사는 물론 세계 자본시장에서도 손꼽히는 증권회사를 만들어보자는 포부가 있었다. 이렇게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증금주 파동의 결말을 잘 따져보면 비록 외부 기관까지 개입해 손실을 보게 됐지만, 그만큼 증권시장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정책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남덕우 재무부 장관의 증권시장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남 장관은 장기영 부총리 시절부터 내려오던 고금리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당시 사채시장 금리는 연 50%가 넘었고, 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도 1967년부터 70년까지 연 30% 수준을 웃돌았다. 국공채 금리도 20%를 넘는 상황이었으니 이런 고금리 아래서는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들어오기 어려웠다.

◇경제 개발 위해 증시 발전은 필수..발행시장 도약 획기적 발판 마련
1974년 5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대기업들의 기업공개를강력히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사진 설명=금융투자협회
재기를 위해 다시 박차고 일어났을 즈음 8.3 조치가 발표됐다. 1972년 8월 3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에는사채 동결 조치를 비롯한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우선 모든 기업은 안고 있는 사채를 전부 정부에 신고하도록 했는데, 기업은 신고했으나 사채업자가 신고하지 않았을 경우 기업은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반신반의하며 당황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고된 사채는 월 1.3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방식으로 바꾸거나 출자로 전환토록 했는데, 이때 신고된 사채 규모가 20만9000건에 3555억원에 달했다. 또 2000억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해 기업의 단기 고리대출을 장기 저리대출로 대환해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을 도왔고, 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를 연 16.8%에서 12%로, 일반대출 금리는 연 19%에서 15.5%로 대폭 인하했다.


아무튼 8.3조치에 따라 일시적으로 은행의 당좌거래가 중지돼 증권시장은 5일까지 휴장해야 했지만 다시 열리자 시장은 점차 활기를 띠어갔다. 무엇보다 사채 동결로 갈 곳을 잃은 유동자금이 대거 주식시장으로 몰려들었고, 고리사채에서 풀려난 기업들은 금리 인하에 따른 금융비용 절감 효과로 재무구조 개선의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은 그야말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몇 달 뒤인 12월에는 기업공개촉진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일정 조건의 법인에 대한 기업공개 명령권과 공개 법인에 대한 법인세 혜택 등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그동안은행 대출 같은 간접 금융에 편중돼왔던 기업 자금 조달 체계를 직접 금융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업공개촉진법에 이어 정부는 1974년 5월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 풍토 조성에 관한 대통령 특별지시 사항’이라는 이른바 5.29 조치를 단행한다.

5.29 특별지시는 앞서 자본시장육성법 제정 이후 정부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기업 공개에 소극적이었던 대기업들에게 여신 상의 불이익과 세무조사 강화라는 채찍을 들이댄 아주강력한 조치였다. 정부가 이렇게 기업 공개를 밀어붙인 것은 무엇보다 증권시장을 통한 산업 자본의 조달을 위해서였지만주식 공급을 늘려 시장 규모를 키우고 시세조종을 원천적으로 방지한다는 이차적인 목적도 있었다. 아무튼이 같은 일련의 조치로 우리나라 발행시장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개 주식에 대한 투자 수요의 과열을 걱정할 정도가 된다.

나는 새 출발의 각오로 삼보증권 사무실을 서울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 건물 3층으로 옮겼다. 150평 규모의 제법 넓은 사무실로 확장한 것이다. 당시 증권회사는 기껏해야 20~30평 정도의 사무실에 전체 직원이라고 해봐야 10여 명이 고작이었는데, 삼보증권이 이렇게 큰 공간으로 이전하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름대로의 구상이 있었다. 사무실을 넓힌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회사 조직도 과감히 개편해 나갈 것이고, 이에 맞춰 신입사원도 공개 채용할 터였다. 증권시장이 발전하지 않으면 1972년부터 시작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제대로 추진될 수 없을 것이었다. 정부가 보내준 신호는 분명했다. 증권업계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나로서는뼈아픈 시련을 겪고 난 뒤 비로소 새롭게 도전하게 된 것이다.

(14회는 증권업계 최초의 공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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