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의 증권반세기] 70년대 처음이자 마지막 증권파동

머니투데이 강성진  | 2014.06.20 10:47

[나의 일 나의 인생] (12) 증금주 파동

편집자주 |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1969년 5월 3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1회 증권의 날 기념식. 자본시장육성법 제정에 이어 증권의 날까지 만들었지만 증권시장은 여전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자본시장육성법' 통과됐지만 증권시장 더 어려워 여전한 침체
자본시장육성법이 1968년 11월 제정되면서 발행시장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으나 유통시장은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68년의 증권시장 전체 거래대금은 400억원으로 60년대 초보다도 적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본격화에 따른 통화 팽창과 물가 상승 억제를 위해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펴나갔다.

 증권시장은 이래저래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삼보증권은 나름대로 선전해 거래대금 기준 시장점유율이 68년에는 11.9%, 69년에는 14.9%로 압도적인 1위를 고수했지만 증시 불황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증금주 파동의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액면가 500원이었던 증금주(證金株, 증권금융회사 주식) 주가는 69년 11월1일 319원으로 바닥권을 형성한 뒤 급속한 회복세를 보였다. 그 배후에는 한양증권의 매수세가 있었다. 당시 매수세력이 단순히 정산차금을 노리고 달려든 것인지, 아니면 시장의 회복을 겨냥한 것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증금주는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해 12월 말에는 액면가를 회복했고 덕분에 시장 전반도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다.

 해를 넘겨 대망의 70년대 첫 거래일이었던 1월4일 증금주는 551원까지 상승했고 23일에는 764원까지 오르면서 62년 5월 증권 파동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1월 말로 접어들면서 한양증권의 자금력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윤도씨가 회장으로 있던 중보증권 등에서 매도공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매수와 매도세력은 증금주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700원선에서 일진일퇴하던 주가는 결국 2월로 접어들면서 하락세로 돌아섰다. 급기야 2월4일과 5일 이틀간 150원이나 폭락하면서 500원대로 주저앉자 증금주를 매수한 개인투자자들이 거래소 입회장에 난입하는 바람에 휴장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6일에는 시장대리인을 향해 계란세례를 퍼붓는 소동까지 벌어졌고 9일에는 주가가 430원으로 떨어지자 증권업협회의 요청으로 투자개발공사가 처음으로 개입해 시장조작을 시도했지만 자금여력의 부족으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증금주 주가는 그 뒤 9월까지 500~600원선에서 오르내렸는데 10월들어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이전까지의 매수와 매도세력이 정반대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니까 주력 매수세였던 한양증권이 매도로, 매도를 이끌었던 중보증권이 매수로 바뀐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당시 시장에서는 업계 1위인 삼보증권도 중보증권과 함께 매도에서 매수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말이 퍼졌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삼보증권은 매수 쪽도 매도 쪽도 아니었다. 다만 나상근씨 같은 당시 삼보증권의 큰 고객 일부가 처음에 매도 쪽에 섰는데, 이들의 주문을 처리하다보니 그렇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증권거래소는 1971년 10월 1일부터 그동안 주로 사용해오던 격탁매매에 의한 집단경쟁매매 방식에서 포스트매매에 의한 개별경쟁매매 방식으로 전환했다. 사진은 상장종목을 업종 별로 분류해 배치한 포스트의 모습(위)과 포스트 매매에 의해 체결된 시세를 게시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증금주 주가 319원→2000원 치솟아...또 다시 몰려온 파동의 먹구름
아무튼 중보증권은 매도에서 매수로 방향을 바꾼 뒤 증금주를 거세게 사들여갔다. 증금주 주가는 10월 초 600원대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12월로 접어들자 1000원선을 돌파하며 시장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무렵 중보증권의 김당도 사장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증보증권에서 증금주 매수에 나서고 있으니 힘을 합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양증권은 앞서 매수한 증금주를 다 판 상태여서 이제 실물도 없이 공매도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삼보증권의 큰 고객인 나상근씨가 증금주를 많이 팔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공매도한 물량도 꽤 있었는데, 중보증권이 매수로 방향을 틀면서 주가가 상승하는 바람에 나씨는 이미 상당한 정산차금 부담을 안고 있었다. 김 사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나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고객을 보호해야 할 처지였다.

 김 사장은 나씨를 설득해 차제에 매수로 돌아서도록 설득해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매수 측의 승산은 더 커질 것이었다. 나는 나씨를 만나 매도는 불리한 것 같으니 매수로 돌아서는 게 나을 것이라고 전했다. 나씨는 내 말에 수긍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나도 개인 자격으로 매수에 가담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과연 이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참으로 힘든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지금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증권시장에 대한 넓은 안목이나 깊이 있는 지식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 두 가지를 꼽자면 하나는 증권 파동 직후 영화증권 사장으로 간 것이고, 또 하나는 바로 증금주 파동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71년 1월2일 나씨와 최종 합의를 하는 한편 당시 동양증권의 사주이자 회장인 윤병강씨도 매수 측에 합류하도록 했다. 사실 증권금융회사는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필요한 기관이고, 앞으로 증권시장이 발전하면 회사도 커나갈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매도 세력에게 밀려 단기적으로 주가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오래 버틸 수만 있다면 적어도 손해보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이로써 중보증권의 김 사장과 동양증권의 윤 회장, 삼보증권의 큰 고객인 나씨, 그리고 나까지 증금주 매수를 위한 4자 연합전선이 형성됐다. 그리고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발행 주식의 50% 이상을 확보하되 최악의 경우 전부 사들이고 그에 따른 손익은 4자가 공동으로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정부 중재 불구 끝내 결제불이행 사태
 아무튼 제7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71년으로 접어들자 증금주 주가는 급등세를 타기 시작해 1000원을 넘어선 지 한 달만인 1월 말 1320원까지 올랐다. 당시 증권금융회사의 자본금은 5억원으로 발행주식 물량이라고 해봐야 100만주가 전부였는데, 이 무렵 증금주건옥량, 즉 미결제 주식이 180만주에 달했다. 그러니까 80만주는 유통가능 물량 이상으로 공매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양증권에서만 50만주 이상을 공매도한 상태로 주가가 계속 상승하자 엄청난 자금 압박을 받았다.

 증금주 주가가 3월 말 1500원 선을 돌파하자 거래소에서는 증금주의 건옥량 전체에 대해 증거금을 늘리는 규제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매수 측에서는 이미 거래된 주식까지 증거금을 추가로 부과하는 것은 잘못됐다며 법원에 효력금지 가처분을 신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증금주는 다시 오르기 시작해 7월15일에는 마침내 2000원을 기록했다. 다급해진 한양증권에서는 당시 해동화재 사장이던 김동만씨의 사위가 경영하는 금성증권을 끌어들여 공매도 물량을 더욱 늘려나갔지만 이미 승기는 놓친 상태였다.

 증금주를 둘러싼 공방전이 점차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자 정부가 중재에 나섰다. 나는 중재를 맡은 김홍경 투자개발공사 총재를 몇 차례 만났는데, 승리를 눈앞에 둔 매수 측 입장에서는 협상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김 총재가 제시한 가격이 합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조건 이쪽 입장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자칫 파동으로 이어질 경우 증권시장이 또다시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틀림없었다. 매수 측은 결국 대국적인 차원에서 김 총재가 제시한 협상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7월26일 1150원의 가격으로 해옥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일단의 고비는 넘기는 듯했지만 금성증권이 다시 대규모 매도물량을 내놓으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4자 연합 쪽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해옥으로 인해 이미 상당한 손실을 봤는데, 추가로 주가가 더 떨어진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매수 측은 즉각 행동에 나서 27일 증금주 주가는 1250원으로 상종가를 기록했다. 게다가 금성증권을 끌어들였던 한양증권은 이 무렵 슬그머니 매수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런데 금성증권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증금주를 무제한으로 팔아댔다. 김동만씨가 아무리 공매도의 귀재라지만 4자 연합에 한양증권까지 가세한 매수세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매도 측의 항복 선언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순간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8월12일 밤 김동만씨가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수도결제 불이행 사태, 증권 파동이 재연된 것이었다.
(13회는 8.3 조치와 새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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