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의 증권반세기] 절망은 다시 희망의 씨앗으로

머니투데이 강성진  | 2014.05.09 10:31

[나의 일 나의 인생](7) 삼보증권 인수

편집자주 |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시장정상화 물거품됐지만…삼보증권 사장으로 새로운 도전
전대미문 '이중해옥' 명령…매수·매도 결제가 따로 책정 제2파동 수습

1962년 5월 증권파동과 제2파동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증권시장은 힘차게 다시 한해를 시작했다. 1963년 1월4일 증권거래소에서 성황리에 새해 첫 거래를 하는 모습.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늘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지만 세상 일이란 즐거움만 계속되지도 않거니와 시련만 이어지는 법도 없다. 하나의 고난을 힘겹게 견뎌내면 늘 새로운 희망과 도전이 주어지는 것이다. 증권시장에 몸담은 지 5년 만에, 영화증권 사장으로서 겪은 배신과 좌절은 그야말로 참담한 것이었다. 심신이 피폐해진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1962년의 마지막 달을 맞았다.

증권거래소는 12월4일 시장대리인들의 입회 거부로 휴장에 들어갔다. 재무부에서는 결국 제2파동에 대한 해결책으로 전대미문의 이중 해옥(二重 解玉)이라는 묘안을 내놓았지만 시장은 또 한번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김세련 재무장관이 강제 해옥 명령을 내린 것은 12월17일이었는데, 그날은 마침 제3공화국의 기틀이 될 개정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된 날이었다.

정부가 해결책으로 내놓은 이중 해옥은 한마디로 매수 측과 매도 측의 해옥선을 다르게 책정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수도 결제가 불이행된 상황에서 매수 측은 가능한 한 높은 가격으로 결제하려고 하고, 매도 측은 가능한 한 낮은 가격으로 결제하려고 하니, 아예 두 가지 해옥선을 책정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11월 당한의 경우 대증주(大證株) 구주(舊株)에 대해서는 매수 측 52전, 매도 측 50전으로 해옥선을 책정했고, 대증주 신주(新株)에 대해서는 매수 측 36전, 매도 측 27전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옥선이 발표되자 매수 측에서는 적당한 해옥선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매도 측에서는 말도 안 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매수 측이 건옥으로 쌓아둔 대증주 구주 3억9700만주의 평균 매수단가가 58전, 대증주 신주 10억900만주의 평균 매수단가는 40전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해옥선을 놓고 대증주 구주의 경우 매수 측은 50전 이상을, 매도 측은 20전을 마지노선으로 고집한 것인데, 막상 발표된 해옥선을 보면 매수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중 해옥으로 인한 차액을 거래소가 배상하게 된 것인데, 당초 자기주식을 팔아서 현금을 확보하려던 거래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자금사정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증권시장 정상화를 위해 쏟았던 노력은 물거품이 돼버린 셈이었다.

나는 병상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봤다. 윤응상씨도 틀림없이 내가 거래소와 증권금융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자기주식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무리 박동섭 이사장이 비밀리에 부탁했다 하더라도 당시 '증권가의 제왕' 소리를 듣던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꿍꿍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래소가 대규모 증자를 해서 모은 자금이 있을 테니 주가를 끌어올려 그 차금을 거래소로부터 받아내겠다는 게 그의 속셈이었다. 정말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증권사 사장단 모임인 증권토요회는 1960년대 증권시장이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증권토요회 간담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오른쪽 4번째가 송대순 당시 증권업협회장, 둘째줄 오른쪽이 필자.
사실 내가 처음 윤씨를 만났을 때부터 그가 늘 강조했던 것이 앞으로 증권시장은 채권이 아니라 주식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산업자본의 조달이라고 하는 증권시장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고, 나 역시 여기에 적극 공감했던 터였다. 그는 또 혁명정부의 군인들을 설득해 증권거래소를 영단제(營團制)에서 주식회사 체제로 바꾸는 데도 한몫했을 정도로 당시 증권가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러나 5월 파동 때 드러난 것처럼 윤씨가 보여준 행동은 전혀 딴판이었다. 나는 윤씨가 그때 워낙 쓰라린 경험을 했으니 다시는 그런 식으로 허황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직접 지켜보니 말과 행동이 너무 달랐다. 자금 능력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사고 나서는 시세를 끌어올려 차금을 얻어내고, 그 돈으로 또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래소를 상대로 차금 챙기기나 하는 건 일개 투기꾼이나 할 짓이었다. 더구나 증권거래소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자기주식을 파는 것인데 증권거래소를 주식회사로 바꾼 사람이 이를 방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대미문의 이중 해옥과 관련해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정부 기관에서 증권시장을 담당하고 있던 인사가 찾아왔다. "강 사장, 이번 일을 어떻게 수습했으면 좋겠소?" 나는 즉답을 피하고 하루 이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세 가지 수습방안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중 해옥이었다. 틀림없이 매수 측과 매도 측 모두 강력하게 저항할 텐데 한쪽을 완전히 죽이지 않으려면 이중 해옥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었다.

아무튼 내가 제시한 이중 해옥 수습 방안과 비슷한 내용의 강제 해옥 명령을 지켜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병원 문을 나서면서 나는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증권시장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쉬는 동안이라고 해서 증권에 대한 생각을 멀리할 수는 없었다.

1963년 들어 주가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급기야 2월25일 전장(前場)에 대증주 신주가 1전9리로 떨어지자 투자자들이 증권거래소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5월 파동 직전 2800%의 프리미엄을 붙여 1원45전(통화 개혁 전 14환50전)에 일반 투자자들에게 청약을 받은 것이 이렇게 폭락했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 결국 증권시장은 무기한 휴장에 들어가 73일간이라는 증시 사상 최장의 휴장을 기록한 끝에 5월9일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3월 초에는 4대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됐는데, 증권 파동의 주동자로 윤응상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구속 수감돼 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7월 초 "의혹의 원인이 없다"는 유명한 판결과 함께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나 역시 5월 파동 당시 동명증권의 실질적인 경영자라 하여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물론 윤씨의 대량 주문을 처리한 게 전부니 애초부터 혐의가 있을 리 없었지만 불려다닌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었다. 또 제2파동의 여파로 그해 1월 영화증권이 파산하자 손해를 본 일부 고객들이 나한테까지 몰려와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법적으로는 아무 책임이 없었지만 도의상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재를 털어 최대한 보상했다.

시장입성 5년만에 회의감…진로 고민
"아내 격려에 자신감" 새 회사 준비중에
매물 나온 삼보증권 인수…시련 딛고 오너경영 시작

삼보증권을 인수할 무렵의 필자.
어쨌든 이 시기는 내 인생에서 중대한 기로였다. 나는 설악산도 오르고 서해안으로 낚시여행도 떠났다. 한밤중 물위에 떠있는 낚시의 찌를 바라보며 이제 30대 중반을 지나가는 내 인생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과연 증권업계에 계속 몸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번 신중히 고민했다. 다른 일을 찾아보자면 지금이 좋은 기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증권업계를 떠나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컸다. 고행길을 걷듯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식으로 증권시장을 떠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새로운 각오로 증권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증권의 증자만 들어도 지겨우니 다른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던 아내도 내 결심을 듣더니 오히려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게 큰 힘이 됐다. 나는 자신감을 갖고 새로 증권회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서류 준비도 하고 임원급 인물도 물색하던 차에 삼보증권이 인수자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삼보증권은 오리엔트시계 창업자로 한국 시계공업의 개척자인 강영진씨가 1962년 6월에 설립해 7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무더기로 신규 허가를 받은 증권회사 중 하나였다. 그 무렵 삼보증권은 사장을 맡고 있던 강씨의 전문분야가 달라서였는지 설립 후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국일증권에 있던 최석환씨를 보내 삼보증권의 재무구조를 살펴보도록 했는데, 불과 며칠 만인 2월28일 최씨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1964년 3월3일자로 인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삼보증권의 자본금은 2500만원, 거래원 번호는 39번이었다.

나는 이제 초라하지만 내 회사의 사장이 됐다. 이전의 동명증권이나 영화증권 때와 달리 오너 경영자가 된 것이다. 나는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오늘부터 이 회사는 나에게 달렸다. 나는 삼보증권의 임직원과 모든 고객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참담한 시련이 가져다 준 벅찬 희망이자 도전이었다. (8회는 영세한 시장과 책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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