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을 버린 이준석, 자신을 버린 세튼 함장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 2014.04.21 06:01

[이슈 인사이트] 젊은 선실 웨이터 2명에 목숨 양보한 '버큰헤이드'호 세튼 함장

1852년 2월27일 630여명을 태운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이드(Birkenhead)호는 남아프리카를 향하고 있었다. 대부분 잠에 빠져 있던 오전 2시, '쾅'하는 굉음과 함께 암초에 부딪힌 배는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선체 앞부분은 빠르게 바닷속으로 빠져들었고 탑승자들은 선체 뒷쪽으로 우선 피신했다. 위치는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에서 약 65km 가량 떨어진 해상.

당시 배에는 함장인 시드니 세튼(Sydney Seton) 대령 휘하의 젊은 장교와 신병 등 약 500명과 그들의 가족인 아이와 부녀자 등 약 130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구명정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180명 뿐이었다.

세튼 함장은 즉시 병사들을 갑판 위로 집결시켜 사열했다. 그리고 배 양쪽 구명정을 풀어 부녀자들을 하선시켰다. 구명정들이 배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장교와 병사들은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구명정이 충분히 멀어지자 세튼 함장은 명령을 내렸다. "물에 뜰 만한 모든 물건을 바다에 집어던져라". 그리곤 최후의 명령이 이어졌다. "전원 바다에 뛰어들어라". 세튼 함장은 배에 남은 사람이 한명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마지막으로 배를 떠났다. 구명정에 탄 아이와 부녀자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남편들이 물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오열했다.

이후 구조선이 도착했지만 이미 436명이 희생된 뒤였다. 당시 생존자 가운데 한명인 91연대 소속 존 우라이트 대위는 이후 이렇게 회고했다. "모두가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처럼 철저히 준수했다"

영국 해군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는 '버큰헤이드호 사건'을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도 영국 해군 뿐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뱃사람들은 항해 중 위협이 닥칠 때마다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Remember the Birkenhead!)라고 서로 속삭인다. 마지막 순간까지 '명예'와 '의무'를 지키자는 다짐이다.


물론 '버큰헤이드호 사건'에 대해 엇갈린 주장도 있다. 당시 생존자 190여명 가운데 아이와 부녀자가 약 20명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증언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다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생존자들이 전한 세튼 함장의 마지막 모습이다. 최후에 배를 떠난 세튼 함장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판자 하나를 발견하고 매달렸다. 체온만 지킨다면 구조선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세튼 함장은 그때 두명의 젊은 선실 웨이터가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작은 판자 하나에 3명이 매달릴 수 없다고 판단한 세튼 함장은 그들에게 판자를 밀어주고 자신은 스스로 물 속으로 빠져들었고, 끝내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장'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3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400여명의 승객을 내팽겨 친 채 혼자 살겠다고 가장 먼저 구조선에 올라타는 모습이 아니라···. 굳이 '선원법'상 선장의 '재선'(在船) 의무나 인명 구조의 의무 등을 들먹일 필요까지도 없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 그리고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 승객들을 불 속에 버린 채 전동차 전원을 통제하는 열쇠를 챙겨 혼자 빠져나간 기관사. 이들은 과연 우리나라의 '국격'이나 '민도'가 이런 수준이라고 말해주는 것일까? 누가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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